▲밤섬 실향민 유덕진씨. 1968년 전 밤섬마을이 산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임영근
밤섬 실향민 유덕진(71)씨를 만나 과거의 밤섬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유씨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 폭파되기 전 밤섬의 모습은 어땠나요?"19살에 지원 입대하기 전까지 밤섬에서 살았습니다. 1966년 이주 발표 후 1967년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에는 한강 물을 먹고 살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로 생활했습니다. 한여름에는 넓은 백사장에서 놀기도 하고, 추운 겨울 한강이 얼면 배가 다닐 수 없어서 섬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개발되기 전의 여의도 모래밭에서 땅콩 농사를 지은 돈으로 밤섬에서 먹고 살았습니다. 땅콩밭 면적이 꽤 넓었던 기억이에요. 돌아가신 부모님 덕분에 잘 지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 당시 밤섬 마을의 교육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요?"초등학교(옛 국민학교)는 가까운 대방동 방면으로 나가기 편리해서 그쪽으로 많이 다녔습니다. 모래사장이 갈라진 길이 있어 통행하기 수월했습니다. 마포구 관할 지역으로 학교에 다니려면 당시 유일한 제1한강교 방면의 모래사장을 이용해 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간혹 그쪽으로 다니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 밤섬을 떠날 당시 심경은 어땠나요?"당시 살길이 막막했지요. 주민들이 대부분 슬퍼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울기도 했고요. 고향 땅이 그립다고 다들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 분들은 지금 거의 고인이 됐습니다. 정서적인 삶은 현대 문명에 비교해서 좀 낙후되긴 했었지만 제가 생각해봐도 그 시절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 와우산 자락에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주하게 됐나요? "정부 보상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밤섬에 거주하던 가구 세대에 한해 '와우산 부근에 땅을 제공하고 집은 세대원들이 판단해서 짓고 살아라'라고 해서 각 가구당 2명이 번갈아 공사장에 나와 터를 다듬고 일을 시작해 한 가구당 약 20평 규모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 지었던 집은 현재 새 아파트가 들어서 사라졌지만 생각해보니 다가구 공동주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 밤섬에 나무가 우거지면서 하나의 숲이 됐습니다. 그 시절에도 그랬나요?"옛날에는 나무가 별로 없었습니다. 퇴적물이 떠밀려 내려와 자연적으로 숲이 이뤄지면서 철새 도래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밤섬은 한강 수위보다 약 80m 정도 높아 예전에 사람들이 살 때 밤섬이 물에 잠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었습니다."
- 밤섬 실향민 고향 방문은 해마다 참여하고 있나요?"가족이 밤섬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어 거의 참석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도 한전(당인리 발전소)에 오래 근무했습니다. 유덕문 밤섬보존회 회장과 같은 직장에 근무했을 때부터 고향인 밤섬을 방문했었습니다."
- 밤섬 보존회는 어떠한 일을 하나요?"밤섬은 밤처럼 생긴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뛰어난 경치를 지녀 율도명사(栗島明沙) 즉, 맑은 모래가 넓게 펼쳐진 섬의 풍광으로 마포팔경 중 하나로 꼽힌 것 같습니다.
500년 전에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마포항이 물산의 집산지로서 번성하면서 고유의 전통한선(황포돛배) 제조업이 발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짓기와 진수 등의 과정에서 유래된 '마포나루배 진수놀이'라는 독특한 전통문화도 간직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를 유지하고 지켜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