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지산영당'
임영열
고향 신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당나라에서 큰 명성을 쌓고,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이국에서의 최치원, 그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붓은 당나라에 있었지만, 그림자는 늘 고향인 신라와 부모님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그의 시문집 <계원필경>을 보면 "아득한 바다가 막혀 부미(負米)의 뜻을 이루기 어렵고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편에 차와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합니다"라는 장계를 고변에게 올렸다고 나와 있다. 이를 보면 최치원이 고국 신라와 고향의 부모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최치원은 16년간의 제당 생활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당 황제 희종은 그의 뜻이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그 공훈에 걸맞은 예우를 베풀어 당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이때가 884년 가을경으로 그의 나이 28세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 했지만 ...최치원의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바닷길에서 풍랑을 만나 곡포에서 정박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신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7년 전 영암의 포구에서 추상같은 훈계를 내렸던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없었다. 그때의 애통함을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우구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 이제 부모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라고 표현했다.
헌강왕은 귀국한 최치원에게 '시독 겸 학림학사'에 임명하였다. 시독은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이었고, 한림학사는 당나라에 올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이때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한시 문집인 <계원필경집>과 <중산복궤집>,<시부집>을 헌강왕에게 바친다. 그러나 반년 뒤 헌강왕이 죽고 그의 동생인 정강왕 마저 1년 만에 죽고 만다. 두왕의 누이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성여왕'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이미 붕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골품제에 의한 신분차별이 엄존했고, 진골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고운도 중앙정권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지방호족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의 켰다. 북쪽에서는 궁예가 이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고, 나주를 중심으로 한 견훤마저 호족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의 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