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구름(孤雲)이 머무는 곳, '지산재(芝山齋)'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비운의 천재, 최치원

등록 2017.10.15 11:11수정 2017.10.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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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149년 전, 서기 868년 어느 날이다. 지금의 전남 영암에 있는 한 포구에서 열두 살의 어린 소년과 그 아버지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십 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아버지의 훈계는 추상과도 같았다. 어린 자식을 이역만리 먼 곳, 당나라로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속마음은 여느 아버지와 같이 짠하고 쓰라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비장했다.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인 고운 최치원과 아버지 최견일과의 이별의 장면이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지산재' 솟을대문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지산재' 솟을대문임영열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에서 도심을 빠져나와 효천역을 거쳐 나주시와 경계를 잇는 도로를 지나다 보면 멀리 '지산재'란 표지판이 보인다. 남평 쪽으로 고개를 넘어 그 길로 우회전하여 철도 건널목을 건너면 약 이십여 가구의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이다. 낙락장송들이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리듯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대숲을 끼고 좌측에 잘 꾸며진 사당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신라 말 대학자이며 문장가,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있는 사우(祠宇), 지산재(芝山齋)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산재는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은 사당이다. 이 고장 후손들이 영당을 세워 최치원 선생의 초상만을 모셔왔으나, 헌종 12년(1846)에 '지산사(芝山祠)'에 강당을 지어 개설하면서 최치원을 중심으로 19 세손(世孫)인 최운한, 최형한 형제와 약포 정오도를 포함해 네 분을 모셨다. 그 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지산사도 훼철(毁撤)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 후 고운(孤雲) 선생의 영정만 봉안해 오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산재 강당
지산재 강당임영열

지산재는 당시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전. 후 퇴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정면 중앙에 서예가 고당 김규태가 쓴 '지산재'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 경내에는 영당과 내삼문, 강당인 지산재, 동제와 서제, 솟을대문이 있다. 선생의 저서로 유명한 <경학대장>과 <계원필경집>을 소장하고 있으며, 건물 왼쪽 빈터에 1985년에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지산재는 조선 후기 영당과 서원이 함께 있는 형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지산재 현판
지산재 현판임영열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당나라로

최치원은 857년(헌안왕 1년)에 신라 경주 사량부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원성왕(?~798)의 명복을 빌기 위한 숭복사라는 절을 지을 때 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으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벼슬은 '아찬(阿飡)'까지 였다. 요즘의 '차관급'에 해당한다. 관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즉, 집의 크기라든가, 마구간의 규모까지도 규제를 받았다. 최견일이 아들 최치원을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보낸 배경도 이러한 신분제 사회의 답답함을 타개하고자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상당수의 6두품이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당나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 깊이 새기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천장에 매달고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며 공부했다는 '현자무가(懸刺無暇)'와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인백기천(人百己千)'의 고사를 만들어냈다. 최치원은 이러한 피나는 노력 끝에 유학을 떠나온 지 6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4년이나 앞당겨서 지켰다. 빈공과는 당나라 조정에서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이었다. 발해인과 신라인들이 많이 응시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후 최치원은 강소성 남부에 있는 선주의 작은 고을인 율수현에서 '현위(縣尉)'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최치원 표준 영정

소금장수 '황소(黃巢)의 난'을 붓으로 격퇴하다

최치원은 약 3년간의 관직을 지내고, 877년 21세 되던 해에 더 높은 학문정진을 위해 현위를 사임한다. 학문을 향해 품었던 높은 이상과 갈망은 그가 현실 생활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단계 높은 공직 시험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산속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혈혈단신 외국청년이 장기간 타향에서 공부에 전념한다는 것은 고독하고도 막막하였을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최치원은 그의 저서 <여객장서>에서 "집은 멀고 길은 험하다. 한없는 근심이 밤새도록 속을 태우고, 먼 고향소식은 해를 지나도록 막혀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마침 문인 출신 고변(高騈)이 '회남 절도사'로 부임해 왔다. 고변은 동부지방 군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최치원은 고변의 휘하에 있었던 그의 과거시험 빈공과 동기생이자 친구인 '고운(顧雲)'의 추천으로 절도사 직속으로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이 무렵에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였다.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해지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황소의 죄상을 고발하고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최치원이 지은 글이다. 문장이 너무나 담대하고 위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 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은 황소와 반란군은 한풀 기세가 꺾여 이극용이 이끈 관군에게 토벌되었다. 반란군 토벌 후 고변의 보고를 받은 희종(僖宗) 황제는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고 격찬을 하였다. 황제는 이 공을 인정하여 정 5품 이상에게만 주는, 궁중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고 면책특권이 있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하였다.

 경주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지산영당'
경주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지산영당'임영열

고향 신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당나라에서 큰 명성을 쌓고,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이국에서의 최치원, 그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붓은 당나라에 있었지만, 그림자는 늘 고향인 신라와 부모님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그의 시문집 <계원필경>을 보면 "아득한 바다가 막혀 부미(負米)의 뜻을 이루기 어렵고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편에 차와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합니다"라는 장계를 고변에게 올렸다고 나와 있다. 이를 보면 최치원이 고국 신라와 고향의 부모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최치원은 16년간의 제당 생활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당 황제 희종은 그의 뜻이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그 공훈에 걸맞은 예우를 베풀어 당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이때가 884년 가을경으로 그의 나이 28세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 했지만 ...

최치원의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바닷길에서 풍랑을 만나 곡포에서 정박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신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7년 전 영암의 포구에서 추상같은 훈계를 내렸던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없었다. 그때의 애통함을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우구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 이제 부모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라고 표현했다.

헌강왕은 귀국한 최치원에게 '시독 겸 학림학사'에 임명하였다. 시독은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이었고, 한림학사는 당나라에 올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이때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한시 문집인 <계원필경집>과 <중산복궤집>,<시부집>을 헌강왕에게 바친다. 그러나 반년 뒤 헌강왕이 죽고 그의 동생인 정강왕 마저 1년 만에 죽고 만다. 두왕의 누이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성여왕'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이미 붕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골품제에 의한 신분차별이 엄존했고, 진골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고운도 중앙정권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지방호족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의 켰다. 북쪽에서는 궁예가 이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고, 나주를 중심으로 한 견훤마저 호족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의 킨다.

 지산재 유허비
지산재 유허비임영열

아! 신라여, 이 나라를 어이할꼬

최치원, 6두품 출신인 그가 신라사회에서 직면하는 신분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진골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견딜 수 없어 자청하여 지방 관직인 태산군, 함양, 부성 등의 태수직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침몰해가는 신라를 구하기 위해 38세 때인 894년에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건의했다. 망해가는 신라를 재건하기 위한 마지막 개혁 정책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 귀족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6두품 출신 인사를 등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6두품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직급인 '아찬'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기득권 세력인 성골과 진골 세력들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어 버린다. 고운선생은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신라 부흥의 꿈을 접은 채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다 생을 마친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신라사회를 개혁하려 한 야망가 최치원! '위대한 신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는, 야망은 컸지만 기득권 세력과 신분제의 높은 벽을 뛰어넘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침몰해가는 신라를 뒤로 한 채 가야산으로 입산하는 고운(孤雲)의 흉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1100여 년이 지난 오늘, '신분제의 벽'보다 더 두터워진 '계층의 벽', 더 단단해진 '기득권 세력들', 이를 어이할꼬...

지산재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가을 하늘에는 고독한 구름 한 점(孤雲)이 둥실 떠가고 있다.
#지산재 #최치원 #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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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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