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1854년(철종 5년) 장흥부에 출도했던 전라좌도 암행어사 조헌섭의 수결(左)과 마패인(中), 그리고 장흥부를 임시로 겸임하고 있던 강진현감의 수결(右)이 보인다. 1854년 10월 엘리트 관료였던 홍문관 부수찬 조헌섭은 수의어사가 되어, 호남 백성을 괴롭힌 장흥부사 김낙승을 봉고파직시켰다. 관찰사의 권한을 지니고 있던 암행어사인지라, 어사의 수결이 강진현감의 수결보다 크고 웅장하다. 인장으로 찍은 암행어사의 마패가 '이마패(二馬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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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암행어사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인해, 조선후기 지방민들이 암행어사에게 걸었던 기대는 무척 컸다고 전해진다.
여동식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박내겸(朴來謙·1780∼1842)은 1822년(순조22년) 평안도 수의어사로 관서지역을 암행하며 그 활동을 적은 '서수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를 통해 당시 암행어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서수일기(西繡日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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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1822) 5월 13일
오후에 일제히 출발하여 황혼에 순안(順安) 관아 문밖에 도착했다.
이곳 수령 이문용(李文容)은 마침 산의 사찰에 놀러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관아의 아전들, 하인들이 그를 맞으려고 모두 관아 문밖에 모여 있었다.
역졸(驛卒)들이 빠른 소리로 어사 출두를 한 번 외치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모두 피했는데 마치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문루(門樓)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 가득 켜졌던 불이 모두 꺼지고 바깥문이 모두 닫혔다. 연달아 소리쳤지만 끝내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수행원들이 두루 들어갔는데 관아 건물이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나도 오래 서 있기가 어려워 천천히 관아로 들어갔는데 역시 비어 있었다.
암행어사의 위엄이 과연 이렇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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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가 왔다는 소문이 평안도 전역에 퍼지자 평안도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암행어사에게 고을의 암울한 현실을 바꿔주리라는 기대를 걸었고, 누군가는 암행어사 또는 그 측근을 사칭하며 범죄를 저질렀다. 누군가는 암행어사를 알아내서 청탁하려고 하였다. 누군가는 암행어사의 업무 수행을 방해하려고 했다.
이처럼 지역민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그 바탕에는 조선 말기 19세기의 상황 속에서 암행어사가 백성들의 희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동식의 일화는 '남매의 혼례를 치뤄준 여어사 [呂繡衣移花接木: 여 수의어사가 교묘한 술책을 쓰다.]' 라는 제목으로 '청구야담'에 실려 있는 야사이다. 영남우도 수의어사로 발령받은 여동식이 백성들 편에 서서 활약한 모습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사편찬위<우리역사넷>, 서수일기(박내겸 著)
[관련 카툰]: 8화 '원혼 해결사' 여동식, 암행어사 출두요! [제공: 카툰공작소 케이비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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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카툰] '혼인 해결사' 여동식, 암행어사 출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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