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분홍고래
"너, 헤엄을 잘 치는구나. 이름이 뭐야?" 다른 한 마리가 대답했어요. "펭권이야." "어, 내 이름이랑 똑같네!" 질문을 한 펭귄이 흠뻑 젖은 채 외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그런데 누가 '펭귄아' 하고 부르면 우리 둘 다 뒤돌아봐야 하잖아." (6쪽)
아이들은 무슨 밥을 먹으면서 살까요? 이 물음을 듣고 우리는 어떻게 대꾸하려나요. 무슨 밥은 무슨 밥, 그냥 밥을 먹고 살지, 하고 대꾸할까요. 이것저것 골고루 갖춘 밥을 먹고 산다고 대꾸할까요. 씹기 부드럽고 잘 넘억가는 밥을 먹고 산다고 대꾸할까요. 어버이가 사랑으로 차려 주는 밥을 먹고 산다고 대꾸할까요.
그런데 아이들은 수저를 들어야 하는 밥만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수저를 들지 않아도 되는 밥도 먹어요. 바로 이야기밥입니다.
하나 더 헤아려 본다면, 수저를 들 적에만 몸을 살리는 밥을 먹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이야기밥을 함께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수저를 놀리면서도 몸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아이는 '수저밥 + 이야기밥'을 누려야 비로소 몸하고 마음이 나란히 튼튼하게 자랍니다. 그리고 수저밥이나 이야기밥에는 언제나 사랑이 바탕에 있어야 하고요.
내게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조카가 있어요. 그다음에는 이야기를 만든 것처럼 레모네이드도 직접 만들어 달라고 해요. 내가 조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면 조카는 이렇게 말하죠. "나쁘진 않은데 다음번엔 더 잘하면 좋겠어." (38쪽)
<엉뚱하기가 천근만근>(분홍고래 펴냄)은 이야기밥입니다. 아이들이 수저밥 못지않게 좋아하는, 때로는 수저밥보다 좋아할 수 있는 이야기밥입니다. 그런데 책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냥 이야기밥은 아닙니다. '엉뚱이야기밥'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엉뚱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리면 이 책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리 엉뚱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엉뚱할 수 있습니다. 숱한 신문이나 방송이 엉뚱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렇지요.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누구를 속이거나 괴롭히는 짓만 잔뜩 나오는 신문이나 방송이 엉뚱할 수 있어요.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이웃들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신문이나 방송이 엉뚱할 수 있지요.
왜 우리는 사건이나 사고를 다루어야 '사회 기사'라고 여길까요? 제비가 둥지를 짓고 알을 낳아 먹이를 먹이는 모습을 다루는 '사회 기사'를 다룰 수 없을까요? 여름을 한국에서 보낸 제비가 가을에 무리를 지어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뒤쫓는 '사회 기사'를 만날 수 없을까요? 제비가 떠나며 빈 둥지를 슬그머니 차지하려는 참새나 박새를 다루는 '사회 기사'를 볼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