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7년, 휴학을 결심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집안에 쌓인 빚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일 년만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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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7년, 휴학을 결심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집안에 쌓인 빚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일 년만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마침 한 시민단체에서 육아휴직 대체인력으로 1년간 일할 계약직 간사를 구했다. 활동가 초임은 세금 제하고 85만 원쯤 됐다. 그해 가을 우석훈의 <88만원 세대>가 나온 걸 고려하면 상징적인 액수다.
그 단체는 20년차 활동가도 매달 200만 원 받기가 힘들었다. 그런 곳에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나간다는 대의명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르바이트할 때 사장님한테 식대 달라는 말은 못해도,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류의 커다란 이야기를 좋아했다. 큰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과 일하면 나도 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부족한 돈은 기존에 하던 주말 알바로 보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주 5일은 시민단체 간사로, 주말은 당구장 알바생으로 사는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생은 담론이 아니라 실전이다. 출근 첫날, 나는 학교에서 '컴활(컴퓨터활용능력)' 수업을 듣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엑셀 단축키는커녕 셀 크기도 조절 못하는 나를 보고, 업무를 인계해줄 간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는 일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후 3개월간 홀로 야근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여느 조직이 그러하듯, 거기도 각개전투였다.
상사는 권위적이었다. 과정보다 효율이 중요했다. 권력 다툼, 파벌 싸움도 있었다. 대의명분은 집회 퍼포먼스에 동원되어 구호를 외칠 때나 들을 수 있었다. 수평적인 의사소통, 민주적인 토론... 그런 건 책에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차라리 당구장이 편했다. 입으로는 거창한 얘기를 해도 술 들어가면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위선적인 상사보다, 차라리 대놓고 추근거리는 당구장 손님들이 나았다.
그 시민단체가 특별히 나쁜 조직은 아니었다. 기대가 큰 만큼 환멸이 컸을 뿐. 그때는 이 땅에 직종을 불문하고, 신입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만두기도 힘든 상황, 나는 숨 쉴 구멍을 찾아 헤맸다.
나를 망치러온 구원자 '나이트클럽' 해방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07년 여름, 나이트클럽이란 곳에 난생처음 가봤다. 삐끼의 손에 못 이기는 척 들어간 그곳은 신세계였다. 안개처럼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비트에 따라 조명이 번쩍였다. 노래를 몰라도, 춤을 못 춰도 상관없었다. 암전과 빛을 오가는 상태가 춤추는 사람들의 동작을 슬로우모션으로 만들어서, 흐느적거리고만 있어도 멋져보였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알콜이다. 과일안주와 맥주 세 병으로 구성된 기본세트가 3만 3천 원. 소주도 팔았으니 싼값에 취하기는 제격이다. 나는 온몸에 땀이 나도록 춤을 췄다. 음주가무와 부킹을 원없이 즐기다보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그 무질서한 공기가 좋았다. 등록금, 빚, 알바, 장학금, 일자리... 지난 몇 년간 누적된 긴장이 나이트클럽만 가면 와르르 무너졌다.
쿵, 쿵, 쿵, 쿵, 심장을 울리는 비트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신림역 4번 출구 '포차나이트 죽순이'가 되었다. 매주 금요일, 우리는 온 힘을 끌어모아 전투모드로 치장했다. 친구들은 내게 아이라인도 그려주고 옷도 빌려주며, 헙수룩한 나를 꾸며주려 애썼다. 12시에 펼쳐질 세계를 상상하면 준비하는 시간부터 설렜다. 주7일 노동자로 늘상 눈치보며 조연으로 살아도, 그 시간만큼은 나도 주인공이 될 테니까. 호박마차를 빌려 타고 파티에 가는 신데렐라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