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의 나이트클럽 입성기

[우리의 20세기 ④] '춤을 추며 절망과 싸운' 나의 젊은 시절

등록 2017.11.11 17:05수정 2017.11.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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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추억의 잇템이 있기 마련입니다. 리바이스 대신 '뱅뱅'이나 '잠뱅이'로 남다른 자태를 뽐내기도 했고, '루카스' 가방을 매고 으쓱 했었죠. '하두리캠'에 열광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열라 놀던 그때, 우리의 20세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는 '덤'입니다. *@}>->----(이것은 장미입니다...) [편집자말]
 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7년, 휴학을 결심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집안에 쌓인 빚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일 년만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7년, 휴학을 결심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집안에 쌓인 빚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일 년만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pixabay

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7년, 휴학을 결심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집안에 쌓인 빚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일 년만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마침 한 시민단체에서 육아휴직 대체인력으로 1년간 일할 계약직 간사를 구했다. 활동가 초임은 세금 제하고 85만 원쯤 됐다. 그해 가을 우석훈의 <88만원 세대>가 나온 걸 고려하면 상징적인 액수다.


그 단체는 20년차 활동가도 매달 200만 원 받기가 힘들었다. 그런 곳에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나간다는 대의명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르바이트할 때 사장님한테 식대 달라는 말은 못해도,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류의 커다란 이야기를 좋아했다. 큰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과 일하면 나도 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부족한 돈은 기존에 하던 주말 알바로 보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주 5일은 시민단체 간사로, 주말은 당구장 알바생으로 사는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생은 담론이 아니라 실전이다. 출근 첫날, 나는 학교에서 '컴활(컴퓨터활용능력)' 수업을 듣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엑셀 단축키는커녕 셀 크기도 조절 못하는 나를 보고, 업무를 인계해줄 간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는 일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후 3개월간 홀로 야근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여느 조직이 그러하듯, 거기도 각개전투였다.

상사는 권위적이었다. 과정보다 효율이 중요했다. 권력 다툼, 파벌 싸움도 있었다. 대의명분은 집회 퍼포먼스에 동원되어 구호를 외칠 때나 들을 수 있었다. 수평적인 의사소통, 민주적인 토론... 그런 건 책에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차라리 당구장이 편했다. 입으로는 거창한 얘기를 해도 술 들어가면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위선적인 상사보다, 차라리 대놓고 추근거리는 당구장 손님들이 나았다.

그 시민단체가 특별히 나쁜 조직은 아니었다. 기대가 큰 만큼 환멸이 컸을 뿐. 그때는 이 땅에 직종을 불문하고, 신입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만두기도 힘든 상황, 나는 숨 쉴 구멍을 찾아 헤맸다.

나를 망치러온 구원자 '나이트클럽'


해방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07년 여름, 나이트클럽이란 곳에 난생처음 가봤다. 삐끼의 손에 못 이기는 척 들어간 그곳은 신세계였다. 안개처럼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비트에 따라 조명이 번쩍였다. 노래를 몰라도, 춤을 못 춰도 상관없었다. 암전과 빛을 오가는 상태가 춤추는 사람들의 동작을 슬로우모션으로 만들어서, 흐느적거리고만 있어도 멋져보였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알콜이다. 과일안주와 맥주 세 병으로 구성된 기본세트가 3만 3천 원. 소주도 팔았으니 싼값에 취하기는 제격이다. 나는 온몸에 땀이 나도록 춤을 췄다. 음주가무와 부킹을 원없이 즐기다보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그 무질서한 공기가 좋았다. 등록금, 빚, 알바, 장학금, 일자리... 지난 몇 년간 누적된 긴장이 나이트클럽만 가면 와르르 무너졌다.


쿵, 쿵, 쿵, 쿵, 심장을 울리는 비트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신림역 4번 출구 '포차나이트 죽순이'가 되었다. 매주 금요일, 우리는 온 힘을 끌어모아 전투모드로 치장했다. 친구들은 내게 아이라인도 그려주고 옷도 빌려주며, 헙수룩한 나를 꾸며주려 애썼다. 12시에 펼쳐질 세계를 상상하면 준비하는 시간부터 설렜다. 주7일 노동자로 늘상 눈치보며 조연으로 살아도, 그 시간만큼은 나도 주인공이 될 테니까. 호박마차를 빌려 타고 파티에 가는 신데렐라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영화 <라라랜드>는 빡세게 꾸미면 자기가 제일 예쁜 줄 알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영화 <라라랜드>는 빡세게 꾸미면 자기가 제일 예쁜 줄 알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라라랜드

내가 사랑했던 신림 포차나이트는 특이한 곳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홍대 클럽은 뮤지션 공연을 즐기거나, '힙한' 소수의 사람들이 춤추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있었다. 그에 비해 신촌의 줄리아나, 파라오 같은 나이트클럽은 문턱이 낮았다. 친구들끼리 술 마시러 나왔다가도 삐끼들이 영업하면 한번쯤 가볼 만했다. 여자들은 이른 시간에 가면 공짜인 곳도 많았다.

그러나 공짜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할 때 나갈 수가 없고, 반강제로 부킹에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나이트의 주 수입은 룸에서 양주시키는 남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3만 원짜리 양주를 20만 원에 팔아먹으려면 웨이터가 일을 열심히 해줘야 하는데, 그게 다 부킹 값이다.

반면 신림 포차나이트는 룸이 몇 개 없고 테이블 중심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테이블마다 무조건 기본세트 이상을 시켜야 한다. 그래서인지 부킹 압력이 덜했다. 여기에 음악은 또 희한하게 클럽 음악이 나왔다. 그래서 신림 포차는 길 건너 그랑프리 나이트와는 달리, 룸에 갈 여력이 안 되는 20대 초중반 애들이 주로 들락거렸다. 신림 포차는 반은 클럽이고, 반은 나이트였던 셈이다.

거짓말, 텔미 그리고 셔플댄스가 '대세'

2007년은 메가히트곡의 해였다. 먼저 빅뱅이 1집 타이틀곡 '거짓말'로 8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뒤이어 9월에 나온 원더걸스의 '텔미'는 멜론차트 17주 연속 1위를 하며, 지금까지 역대 걸그룹 최장기간 히트곡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갖고 있다. 그해 여름에는 어딜 가도 이 두 곡이 흘러나왔다. 소희의 깜찍한 '어머나' 동작 정도는 누구나 할 줄 알았다. 신림 포차 나이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무렵 나이트로 출근하다시피 했던 한 친구는 두 곡의 안무를 통째로 외웠다. 그런 여자들이 꽤 있었다. 아마도 그녀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핑클, SES, H.O.T, 젝키, 지오디로 이어지는 아이돌 그룹의 안무를 익혀 왔으리라. 가끔 남자들 중에도 안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림 포차에서는 매주 수요일 댄스 경연대회를 열었는데, 한번은 거기서 텔미 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한 남자를 발견했다.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웨이터한테 그 테이블로 부킹 좀 시켜달라고 조를 정도였다. 알고 보니 그는 전직 백댄서이자 현직 댄스 강사였다고.

정작 내가 신나게 놀았던 곡은 '큐피드 셔플(cupid shuffle)'이다. 뮤지션 큐피드가 2007년에 내놓은 이 곡은 빌보드차트에서는 그저 그랬지만, 클럽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셔플댄스 바람을 일으켰다. "down down do you dance, do you dance~"로 이어지는 후렴구가 핵심이다.

여기서는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춤을 춘다. 오른쪽으로 네 번, 왼쪽으로 네 번 성큼성큼 갔다가 제자리에서 트위스트로 마무리한 다음, 90도 틀어서 같은 동작을 네 번 반복하면 된다. 이 스텝이 마카레나 댄스만큼이나 쉽다. 그래서 셔플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몇 번만 보면 바로 따라할 수 있다. 한 공간에서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는, 1980년대 생의 사람들. 그 속에는 한 시대를 같이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 일체감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던 공간이건만.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던 공간이건만. pixabay

그리도 즐겨 찾던 신림 포차나이트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발길을 끊는다. 이유가 있었다. 나이트클럽이 즐거움만 안겨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대와 룸은 이야기가 달랐다. 테이블에 익숙했던 나는 룸의 미묘한 기류를 잘 읽어내지 못했다. 언젠가 남자가 둘 있는 방에 부킹을 갔다가 혼자 남은 적이 있다. 일어나려는 순간, 옆에 앉은 남자가 내 손목을 붙잡아 벽에 밀쳤다.

그때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아찔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이트클럽을 끊었다. 신림 포차를 시작으로 신촌 파라오, 줄리아나, 부천 스피드, 인천 아라비안, 수원 터널로 이어진 나의 나이트클럽 순회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2000년대 후반 들어 나이트클럽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홍대, 이태원, 강남의 클럽이 점점 인기를 얻어가던 시기다. 취직 준비가 길어지는 바람에 나는 이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신림 포차 나이트클럽을 떠올리며 흘러간 음주가무의 시대를 아쉬워한다.

나이트클럽 멤버들도 결혼한 지 오래, 가끔 육아 커뮤니티에서 '화끈하게 놀던 그때가 그립다'는 글들을 보면 회상에 잠긴다. 그때 그렇게 돈이 궁했어도 미친 듯이 놀러다녔던 게 후회되지는 않는다. 낮에는 시대에 짓눌린 88만원 세대를 살아도, 그 밤들은 오롯이 젊음의 시간이었으므로.
#우리의20세기 #나이트클럽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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