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제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그래야 연애도 하고." 할머니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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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걸그룹 F(x)의 멤버인 엠버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계정에 "내 가슴은 어디에?(악플에 답하며) Where is my chest?(Responding to Hate Comments)"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 속 그녀는 "엠버의 가슴은 어디 있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친구와 함께 '자신의 가슴'을 찾아 나선다.
엠버는 과거 SNS에 "'너는 여자처럼 언제 할 거야?' 저는 여자예요. 여자는 원하는 스타일로 사는 거예요. 이런 거(질문) 좀 그만합시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나도 같은 질문을 들은 적 있다. 소위 '남자처럼' 꾸미고 다녀서냐고? 아니, 뚱뚱해서다.
겨울이었다. 막 스무 살이 된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마지막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때마침 설이라 할머니댁에 가족 모두가 모였다. 당연히 '여자들'은 한데 모여 송편을 빚고, 남자들은 텔레비전 앞에 누워있었다. 문득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서희는 아주 예뻐졌더라. 어릴 때는 사내애 같던 게." 나는 서희 언니가 누군지 알았다. 아니, 몰랐다. 그녀는 내게 어떤 실체가 아니었다. 늘 친척들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무용한다는 애, 아주 참하다는 애. 그 말들로 만들어낸 어떤 뭉뚱그린 몸이, 내게는 김서희였다.
그녀가 어떤 이들의 눈에 '사내아이' 같았던 시절은 아마 10살 무렵까지일 것이다. 서희 언니는 이제 스물넷이다. 한차례 대화가 지나가고, 송편만 빚던 할머니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도 이제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그래야 연애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중학교 때 숏컷에 체육복 바지만 입고 다니던 과거가 있다곤 하나, 지금의 나는 말하자면 충분히 '여자애'처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할머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았을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살 빼야지, 살 빼서 '여자'가 되어야지.
뚱뚱한 여성은 뚱뚱한 남성과 다르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여성'임을 의심받는다. 하지만 남성은 어떤가. 뚱뚱한 남성에게 "'남자니까' 살 좀 빼"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너무 뚱뚱하면 남자로 안 느껴져요"라는 표현은 '메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등장했다. 그 전에는 어땠는가. 남자에게 뚱뚱함은 대개 '인격'이고, '푸근함'으로 여겨졌다.
비단 성적 매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뚱뚱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남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말하는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 여자의 특성, 남자의 특성에서 그들은 충분히 '남성'의 카테고리 안에 속할 수 있다. 뚱뚱한 남자들은 남성로서의 모든 특성을 인정받는다.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할 것은 아마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남성들 본인일 것이다.
뚱뚱하지만 사람 좋고, 호탕하고, 돈도 잘 쓰는 친구가 "걘 남성으로서는 좀 그렇지"라는 평가를 듣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있다면 그래, 나도 그냥 내 가슴을 찾으러 떠나야겠다. 반대로, 뚱뚱한 여자는 어떤가. 비만한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한 현실 인식을 부정할 수 없다. 내 몸은 단순한 실체가 아니다. 사람들의 말을 통해 만들어진다.
"살 안 빼?", "돼지 같아", "너 때문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솔직히 두 분 중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누굴 뽑을까요?", "행동 굼뜬 거 봐", "건강을 위해 하는 말이야"... 질문과 답이 쌓여 내 몸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잘 경험하지 않는 일이다. 그들에게 체중은 단점이지만, 내게 체중은 '반드시 고쳐야할 문제점'이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뜬금없이 복도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이름에 발을 멈췄다. 유진이는? 에이, 걘 다리가 좀 짧잖아. 연희는? 걘 얼굴이 진짜, 와... 웃음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들려왔다. 그럼 OO이는? 그들은 폭소하고 말았다.
"걘 여자로 치면 안 되지."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왜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