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국가정보원(국정원) 전경
남소연
국정원 시험은 논술이 크게 좌우한다고 했다. 꽤 좋은 대학의 학생들이 몰리기에 점수 편차가 크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글쓰기는 내가 가진 재주 중 그나마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했기에 오히려 걱정이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도 논출 첨삭 과외도 하면서 하숙비를 냈다. 처음 학원 관계자와 상담을 할 때도 서로가 큰 기대에 차 있었기에 논술이 문제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내게 희망을 줬다.
"영웅 학생 프로필을 봤는데요. 솔직히 학교 레벨이 살짝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머지 요건들이 커버할 수 있는 조건이라 해볼만 하겠어요. 지금부터 학점 관리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결과 있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결국 논술이 좌우할 텐데... 음, 국문과랬죠...?"어쩌면 찾아온 모두에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큼 내게 달콤하게 들렸던 그날의 상담은 내게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해줬다.
#예상치 못한 난관, 논술그런데 막상 시험을 준비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벽을 만났다. 바로 논술이었다. 이 학원은 학원장이 직접 논술지도를 해준다. 게다가 그는 국정원 간부 출신이다. 이보다 훌륭한 조언자가 있을까? 그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논술 첨삭을 받으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첨삭 내용을 요약하면 딱 하나다. 당시 원장이 알려준 국정원이 좋아하는 논술 기조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연적이므로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일부 국민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안고 가야 한다'였다.
첨삭 내용을 바탕으로 글의 논조를 180도 틀어야 했다. 내가 쓰는 글은 항상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자. 그리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게 약자는 아니었으면'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희생의 대상에 대해 항상 불만이었다. 결코 내가 가진 것을 잃기 싫은 개인적인 생각의 확장은 아니었다.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국가관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짧은 식견이었지만 마음으로 써내려 갔었다(이는 대기업의 홍보실 직원이었을 때도, 현재 시청에서 서울시를 홍보하는 일을 할 때도 이런 국가관은 유효하다).
"역사적으로 되짚어볼 때 사회 전체적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사회적 약자들은 피해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 달콤한 열매는 희생을 감내했던 이들보다 아닌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이 돌아갔던 것은 아닌지 국가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이러한 순환이 반복되는 구조는 개인의 자유가 침해 받지 않는 선에서 개선되어야 하며, 또한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가는 것에 우리는 더 부끄럽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공무원이라면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거나, 못본 체 하다 보니 '강요 받은 희생의 악순환'이 축적되어 권력과 재산, 정보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결국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 사이에 괴리감이 생겼다."위와 같은 생각들이 내가 작성한 모든 논술의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논술을 심화시켜 나가다 보니 원장은 난색을 표하기 일색이었다. 원장이 나에게 '진보냐'는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대답 대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일하는 지금도 내게 누가 물으면 나는 당당히 '보수'라고 말한다.
점점 학원에 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특히 논술 수업이 있는 날은 학원을 빼먹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개월을 버티다 더이상 종각역으로 가는 1호선을 타지 않았다. 그곳에는 내가 생각한 정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여기엔 장밋빛 미래가 없다고 판단됐다.
#국정원, 솔직히 못간 게 맞다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내가 못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야'라는 생각이었다. 인생에서 (수능을 빼고) 여느 시험에서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시험 운이 좋고 시험에 강하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그런데 막상 글을 써내려 가며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과연 못간 것일까, 안간 것일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볼수록 안간 게 아니라 못간 게 맞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들은 똑똑하게 말 잘 듣고 대의(?)를 따를 줄 아는 애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는데, 그들의 기준에 나는 말을 잘 듣는 애도, 대의를 따를 줄도 모르는 아이였을 것이다. 결국, 자격미달. 탈락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댓글달기를 참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큰 결격사유가 아닐까?
#박원순, MB를 고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