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개척단 출신 여성들은 국가와 언론이 덧씌운 낙인에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화자(오른쪽)씨는 자식들에게 그 낙인이 대물림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남소연
"걸리면 죽어유. 몽둥이로 막 때려유. 죽도록 때려유. 배고프니께. 도망가다가 붙들려서 죽고. 거적때기 싸서 묻어버리고.""우리 대원하나는 붙들려서 죽어버렸어유. 도망가다가. 막사에 드러누워 버렸다고. 흰죽을 쒀가지고 입에다 떠먹였는디 못 일어나대유."배고픈 일상만큼 떠올리기 싫은 것은 폭력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윤씨는 자신의 밥을 받아먹던 대원 하나가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또렷이 상기했다. "열댓 살 쬐깐한 것들부터 스무 살 장정들"까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웃들이 '얻어터지고 죽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개척단원 정영철씨의 부인인 장교수(71)씨도 '도망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하나가 튀어 들어오니 깜짝 놀랐지. 울 아버지가 '쟤 붙들리면 죽으니께 구석에 이불 쌓아놓고 덮어라'고 하대. 그리고 두 명인가 들어와서는 '사람 안 들어왔느냐'고. 방이고 어디고 다 쑤시고 가더라고. 새벽 1시쯤인가 서산 시내에 데려다 줬어. 잘 갔으면 편지라도 쓰라고 주소를 써줬는디. 연락이 없어. 수수께끼여.""결혼 날짜 잡아 놓고 강제로 끌어다가 사진을 찍는디... 서울 워커힐에서도 그랬디야. 우리 애들 아배가 그랬잖여. 장가들 생각도 없는디 어떤 여자 데려다가 사진 찍었대잖아. 그렇게 짝을 지어줬디야. 그래서 이내 헤어져 부렀지."간척장 마을인 모월리 옆 동네 산동리 출신인 장씨. 정씨가 1964년 서울 워커힐에서 강제 결혼한 여성과 이별한 후, 옆 마을에 옷을 떼러 갔다가 '홀딱' 반해 청혼한 이가 장교수씨다. 모월리 지척에서 살다 보니 개척단원들이 도망치다 "얻어터지는 것"도 자주 목격했다. 1963년 1차 강제결혼식 때는 동네 또래들과 하얀 꽃을 접어 신부의 가슴팍에 달아주기도 했다.
가난에 꼬질꼬질 찌든 남편이었지만, 어쩐지 "불쌍하고 안타까워" 1969년 식을 올렸다. 신혼 생활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신혼집에는 남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 넷이 웅크리고 있었다. 남편이 개척단 해체 후 거둔 대원들이었다. 대원들은 장씨를 '엄마'라고 부르다 장성한 뒤에는 '형수'라 불렀다.
"며칠 전에는 부산서 사는 (개척단) 삼촌이 술 한 잔 거나하게 하고 왔더라. 눈물을 막 흘리면서 '형수, 우리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고생했는데 보답도 제대로 못하고 죄송하다'고 하대. '형수 인자 괜찮아, 남한테 무릎 안 꿇려' 했제."여전한 가난, 전무한 보상강제 결혼과 강제 노역. 일상적인 폭력, 또는 누군가의 죽음. 당하고 목격한 이는 있는데 가해 주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정씨는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는데 여길 떠나느냐"고 했다. 도배를 반복하고 장판을 새로 깔면서도 이 '빌어먹을' 땅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윤씨는 특히 개척단 해체 후 가분배 받은 3천 평 중 1천여 평에 '논 값'을 대고 있었다. 나머지 2천 여 평은 40여 년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르느라 "헐값에 팔아버렸다"고 했다. 정씨는 "농사 지을 능력이 없어 일찍이 팔았다"면서 "지금 같으면 1정보(3000평)에 몇 천 만원인데, 그때만 해도 몇 십만 원이었다"고 한탄했다. 할머니들이 무상 강제 노역에 대한 인건비와 강제 결혼으로 인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누가복음 10장 5절' 매점과 가정집이 붙어있는 정씨의 집 곳곳에는 '평안'과 '평화'가 쓰인 성경 표구가 걸려 있었다. 부엌 한편에는 낡은 냉장고 3대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제철마다 거둔 나물과 식재료가 가득 들어있다고 했다. "못 먹고 산 설움 때문에 음식 해다 남에게 주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막걸리 10병만 갖고 갈게유" 가끔 들리는 손님은 습관처럼 외상을 달았다. 노령연금과 두 아들이 붙여주는 용돈이 할머니의 생활비였다.
윤기숙씨는 집 보여주기를 극도로 꺼렸다. "동네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 부끄럽다"는 이유였다. 먼지가 시커멓게 내려앉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는 시멘트 담벼락이 대강 둘러섰다. 집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었다. 지붕과 천장 사이로 넓은 틈도 간간이 보였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청년대원 8명과 부부와 아들이 살았다고 했다.
없는 게 많은 집이었다. 보일러가 없어 연탄으로 불을 때고, 세탁기가 없어 팔십 노인이 함께 사는 큰아들의 빨래까지 하고 있었다. 유일한 수입은 나라에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 20만 6천 원. 윤씨는 쑥스러운 얼굴로 "그냥 조금... 조금만 보상해줬으면 좋겠어유"라고 말했다. 보상 받으면 뭘 하고 싶냐고 묻자 "집 좀 고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