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핵발전소만 사는 곳

판도라탐사대 4월 탐사 참가자 후기

등록 2017.11.30 17:34수정 2017.11.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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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리의 해변. 핵발전소의 실상을 빼놓고선 바다도, 노을도 아름답다
나아리의 해변. 핵발전소의 실상을 빼놓고선 바다도, 노을도 아름답다청년초록네트워크

"현장에 가면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승용차에 올라타서 참가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 답사를 주최한 청년초록네트워크에 소속돼있진 않지만 3·11실천단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탈핵 운동에 입문하는 계기였고 그 활동의 자리에서 현장 방문의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종종 들었다. 이번 답사에는 핵발전소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와 지역주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세부문제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1박 2일의 답사 동안, 승용차는 핵발전소 밀집지역인 경주, 울산, 부산을 열심히 누볐다. 승용차는 문을 옆으로 끌어여는, 오랜만에 타는 종류의 차였다. 차와 사람들은 서울에서 경주까지 긴 길을 달렸다. 나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처음 만난 탐사대원들과 자기소개를 나눴다. 이른 아침을 연 사람들은 각자 잠이 들었다. 나는 안대를 끼고 자다가 깨서는 과자를 먹었다. 낱개 봉지를 하나씩 뜯을 때마다 초록색 녹차향이 퍼졌다. 창문으로 도로가 끝없이 보이고 너머 언덕에 송전탑이 보였다. 탈핵을 공부하며 핵발전소가 송전탑을 만든다는 걸 알고 보니 과연 탑들이 크고 많았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 송전탑들이 심상치 않게 크고 자주 보인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 송전탑들이 심상치 않게 크고 자주 보인다.청년초록네트워크
오랜만에 간 경주는 수려한 멋이 있었다. 내가 경주에 세 번 정도 갔던가? 도심에 남아있는 논밭과 낮은 건물들을 좋아한다. 선거 현수막이 걸려있고 유세 인파가 모여있는 경주역에서 남은 일행을 태웠다. 그리고 방폐장 홍보관으로 갔다. 홍보관은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앞에 두고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제주의 올레코스 7번에서 보는 풍경과 비슷했다. 다만 경치를 누리고 앉아있는 것은 카페가 아닌 핵시설이었다. 조금만 덜 진지했더라면 저 멀리 바닷마을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여행을 즐길 뻔했다.

홍보관은 훈더르트바서의 건축물처럼 꼬불꼬불하고 유연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작았다. 전시실에 상주하는 직원이 따로 없어 우리의 '탈핵 홍보관 만들기'는 충돌을 받지 않았다. 포스트잇과 접착지에 홍보 내용을 비웃고 반박하는 내용을 써붙였다. 방사선의 유용한 쓰임새를 알리는 모니터엔 '여기에만 써라'를 붙이고 방명록엔 '싫어요. 아니에요. 위험해요.'를 붙였다. 짧은 승리였다. 차를 타고 근처의 원자력발전 홍보관으로 갔다.

건물의 앞에는 천막이 있었는데 그 안에선 길고 거친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 사무실이었다. 거기서 종이컵 커피를 한 잔씩 받고 마주 앉아 얘기를 들었다. 여러모로 답답하고 참혹한 말들이 나왔다. '원자력'이 이곳 나아리를 망가뜨렸다는 것, 발전소에서 장기적으로 삼중수소가 노출된다는 것, 주민들의 질병 발생율이 높다는 것, 한수원의 오랜 농간으로 주민들 간의 여론이 분열돼있다는 것···. 말하는 사이 바깥이 비치는 문으로 차들이 지나갔다. 말을 훑고 묻혀가며 지나갔다.

 길고 거친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 사무실. 천막 뒤로 
‘당신은 방사능 피폭 위험지역에 들어오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길고 거친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월성핵발전소 이주대책위 사무실. 천막 뒤로 ‘당신은 방사능 피폭 위험지역에 들어오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청년초록네트워크

이야기를 들으면서 탈핵의 시야가 넓어졌다. 핵발전소는 폭발 이전에도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고 후의 재난'에서 '사고 중인 재난'으로 문제의식이 확장됐다. 아는 것 없이 찾아간 나로서는 할 질문도, 논제도, 위로도 없었지만 여기 또 알아야하는 게 있다하는 확실한 느낌은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핵발전의 위험을 '통제할 수 없는 사고'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정상' 가동 중이라도 핵발전은 싸지 않고, 깨끗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다'의 측면에선 인간이 결코 완전 제어할 수 없는 핵기술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초래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원전 노동자의 피폭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으나 예외적인 사항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핵발전소 가동 중 각종 사고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방사선 물질이 지속적으로 외부로 방출된다는 사실은 몰랐다. 주민들은 건강과 생계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땅 매매가 안 되고 농산물을 파는 것에도 지장이 있다고 했다.

때문에 그들은 살려달라고 말한다. 자신들을 이주시켜줄 것을 우선적으로 주장한다. '서울 시민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이미 '오염이 돼서 망가진 동네'가 되어버렸다. 탈핵 운동을 통해 월성 핵발전소가 만약 '없어져도 여기서 살 수가 없'다. 땅과 바다는 죽었고 외부 사람은 오지 않고 안에서 살아갈 생계는 막막하다. 빨간색 점퍼를 입고 캡모자를 눌러쓴 한 위원분은 자신있게 이곳이 천혜의 땅이었다고 말했다. 살기좋은 곳이고 살러오는 곳이라고 자부했다. 나는 차를 타고 오며 풍경의 아름다움을 생각했기 때문에 말없이 고갯짓으로 동의했다.


탈핵 문제와 상관없이 고아한 경주는 하늘은 푸르르고 바다는 넓직하고 화창했다. 그러나 핵발전소와 파괴된 터전과 피폭된 삶들을 알게 되자 슬픈 대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을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그들의 죽임을, 천천히 방기하는 것과 같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삼백사명의 사람을 구하지 못해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깊고 낮은 한숨을 내뱉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주목해야 한다. "살려달라"라는 말에 반응해야 한다... 나의 반응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탈脫핵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고 우리에게 중요한 탈핵 의제는 그들의 이주 문제가 되어야 한다.

 이미 이주를 한 번 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또다시 핵발전의 확장으로 없어질 마을
신리마을과, 나 같은 서울시민의 편리한 전기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 파병군 신고리3?4호기의 실물을 기억하겠다
이미 이주를 한 번 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또다시 핵발전의 확장으로 없어질 마을 신리마을과, 나 같은 서울시민의 편리한 전기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 파병군 신고리3?4호기의 실물을 기억하겠다청년초록네트워크

근처 해변에 가서 핵발전소와 마주했다. 예상한 것처럼 압도적이진 않았다. 만화 심슨 가족에 나오는 연기를 뿜는 거대한 괴물을 상상했던 나에게는 그랬다. 그 뒤에 송전탑이 송송이 뒤따르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평범한 전기 공장이라고 해도 넘어갈 것 같았다. (실제로 고리발전소가 처음 지어질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저 '전기 공장'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곳이 문제적으로 느껴졌던 건 사람들 뒤에 천연덕스럽게 서서 한 배경을 이루는 태도와 만지기 힘든 바다에서였다. 우리들은 모래를 밟고 한 줄로 서서 뒤를 돌아봤다. 자연스러움을 요구하는 사진가의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며 웃었다. 나는 무리를 벗어나 파도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늘 하던 것처럼 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잠깐 들렸다가 떠나갈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만지고 싶지 않았다. 삼중수소가 유출된다는 말을 들은 후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핵발전소는 바다를 뺏어가는 친근한 유괴범의 모습이었다.

다음 날에는 울산·부산으로 내려가 고리 단지의 원전을 봤는데 웅장한 느낌이 있었다. 에너지정의운동의 활동가 한 분의 안내 해설로 지역 현장을 둘러보았다. 신고리 3·4호기의 큰 돔에는 파란새가 그려져있었다. 곧 없어진다는 신리마을을 돌아, 없어지고 있는 골매마을 쪽에서 한번 더 바라보았다. 바다와, 집이 무너진 철거더미와, 대규모의 송전탑, 또 탑처럼 죽죽 솟아있는 크레인 왼쪽에 발전소 몸체가 있었다. 그걸 바라보고 서있는 지점 또한 신고리 5·6호기가 세워지면 출입이 통제될 거라고 했다. 핵발전소의 실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사라지고 통제되는 것이다.

신고리 이전에는 월내 방파제에서부터 (구)고리핵발전소 주변을 돌았다. 고리 정문에서 모르고 사진을 찍다가 삭제를 요구받아 이곳이 보안 시설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 있는 비석 뒤에 반 원으로 둘러서서 얘기를 나눴다. 무성한 토끼풀이 내 발에 밟히고 있는 게 느껴졌다. 비석의 뒷면에는 발전소에 밀려난 마을에 대한 기억과 작은 기념이 적혀 있었다. "고리는 마을 이름에 불을 안았던 인연으로 오늘 여기 민족 웅비의 힘의 원천 원자력 발전소가 섰네."

그 밖에 우리는 노동당 당사에서 이곳 지역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기장 해수담수화 반대운동을 해오신 분들과 만났다. 해수담수화 운동을 했던 두 분이 나와 그동안의 일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핵발전소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해수담수화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핵발전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더니, 이 싸움을 하면서 전적으로 알게 된 것들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운동을 하고 싸움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모두 전문가가 되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고 먼 길에 다시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어두워질 때까지 책을 읽었고 바깥이 깜깜해지고 나서는 라디오를 들었다. 대선 토론회를 하고 있었다. 후보들의 핵발전 공약에 서울 시민과 경주·울산·부산 주민들, 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걸려있었다.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답사를 다녀오며 사회운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 동료로부터 활동의 동기에는 자족적인 공부의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이 담겨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드 반입에 저항하는 성주와 5월을 기억하는 광주··· 가야 '하는' 곳이 늘어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판도라탐사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이라는 ‘판도라’를 함께 들여보고, 핵산업에 맞서 대안을 찾는 프로젝트입니다. 2017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탈핵운동지역을 돌아본 도시 청년들의 경험을 글과 만화로 엮었습니다.
#판도라탐사대 #탈핵 #청년초록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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