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열고 나온 딸에게 보내는 엄마의 반성문

눈물로 범벅된 딸의 얼굴... 괜찮아, 그저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등록 2017.12.11 08:49수정 2017.12.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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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11시 45분이다. 오전이냐고? 그럴 리가. 우리 딸은 절대 오전 시간에는 활동성을 갖지 못한다. 시들시들 늘어져 있던 세포들이 일제히 '차렷, 점호!'를 외치며 일어나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돌아다니는 것은 바로 야간 시간대다.


구슬려도 보고 말려도 보았지만 속 타들어 가는 건 내 사정이다. 딸은 꿋꿋하게 자정이나 새벽 1시 귀가를 지상 목표로 삼은 듯 철저하다. "휴…." 타는 속을 달래려 냉수 한 잔을 들이킨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은 사람 꼴을 하고 생기 있게 살아가니 말이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 전이다. 외출도 안 하고 혼자 끙끙거리며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고난의 하루를 살아내는 딸의 모습에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건지 물어봐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며 더욱 깊숙이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곤 했다. 하루면 나아지겠지, 며칠이면 될 거야, 하는 바람과 달리 툭툭 털고 일어설 기색이 없어 우리는 나날이 사색이 짙어졌다.

어릴 적부터 천재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받을 정도로 똑똑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어딜 가나 상을 휩쓸어 학교에서 유명했던 딸인지라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딸바보'인 남편의 꺼지는 한숨 소리는 내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어쩌랴. 자식 낳은 죄인 된 심정으로 우리는 모든 걸 내려놓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대화를 시도했다.

a  외출도 안 하고 혼자 끙끙거리며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고난의 하루를 살아내는 딸의 모습에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외출도 안 하고 혼자 끙끙거리며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고난의 하루를 살아내는 딸의 모습에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 pixabay


"우리는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단다. 너 하고 싶은 것하고 살아. 그저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었을까. 철철 흐르는 눈물로 범벅된 딸의 얼굴은 내 가슴을 후벼 파서 피 웅덩이를 만든 듯했다.


"어디니? 이렇게 늦게 위험하게."

속에선 불길이 일렁이나 보드랍고 정다운 목소리로, 하지만 전화기는 부러트릴 기세로 붙들고 간신히 묻는다.


"아, 네 지금 들어가는 중이에요."

촬영 때문에 늦었다고 변명을 한다. '어쩔 수 없지, 촬영 때문이라는데'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산중에서만 도를 닦는 건 아니다. 이렇게 속세에서도 날마다 강요된 도를 닦고 있는 것이다. 몇 년만 더 지나면 하산이라도 해야 할 지경인데 어디로 가나. 중얼중얼하며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온갖 상처로 내 마음은 멍투성이, 피투성이가 되었건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영원한 시시포스의 바윗덩어리 같던 고민도 차차로 수그러져 진정이 됐다. 대학도 본인이 원하는 예술대학에 입학해 이렇게 밤 고양이처럼 안광을 발하며 동서남북 종횡무진 중인 것이다.

캄캄했던 지난 시간이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견고한 호두 껍데기 같던 나의 머리를 열어 위로 아래로 더 이해하고 포용해야 될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딸과의 관계도 훨씬 돈독해진 것이다.

가끔 어설픈 효녀 노릇이라도 할라치면 난 내심 흐뭇해서 지난했던 시간들에 찡긋 미소를 보내본다. 고난은 한 개를 거칠게 빼앗고 두 개를 살그머니 쥐여주고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손바닥을 펼쳐보면 보일 것이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두 개가.
#딸 #사춘기 #고민 #부모되기 #자식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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