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전 교수가 최근 펴낸 <촛불 이후>
한울
고원 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진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 의미있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정립됐다. 크게 '자생적 사회주의, 민중주의적 지향의 그룹'을 진보정당으로 발전시킨 세력과 보수야당에 뿌리를 두고 점차 '리버럴 진보'(liberal progressive)'로 정체성을 변화시킨 세력이 한국의 진보를 구성하는 큰 축이다.
후자는 해방공간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으로 불린 세력으로 대지주출신이 많았고, 극우적이고 반공주의적이었다. 이들은 흔히 '보수 야당'으로 불렸다. 고원 전 교수는 "이들이 야당이 된 이유는 순전히 이승만과 친일관료 집단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배제되어서다"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보수 야당' 세력은 1960년대부터 '리버럴 정당'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한 '정체성 변화'를 이끈 지도자가 '양김'(김대중, 김영삼)이었다. 고원 전 교수는 "리버럴 정당으로의 발전은 민주화를 거쳐 김대중이 정립한 '중도 개혁 노선'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라고 썼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좀더 보수성이 강한 그룹과 진보성이 강한 그룹 간의 연합정당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당 안에 진보적 그룹의 입김이 강화되면 다시 한번 리버럴 진보를 지향하는 정체성 변화의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났다."(234-235쪽)
'보수 야당'이 그러한 정체성 변화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중도주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고원 전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이들은 여전히 보수 야당으로서의 역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한계를 중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자, 타칭 중도주의자들은 자기 정체성이 매우 결핍되어 있다. 자기 노선에 대한 포지티브한 규정이 없고, '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는 식의 네거티브한 규정에만 매달려 있다. 그들은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유권자를 견인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이념을 감추고 정체성을 모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구도 정립에 실패해 중심 지지층을 흩어지게 만든다." (235~236쪽)조지 레이코프는 자신의 저서 <프레임전쟁>에서 "중도주의자들은 실상 어떤 이슈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취하고, 다른 이슈에서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이중주의자들일 뿐이다"라는 꼬집었다.
안철수가 삼아야 했던 정치적 근거지고원 전 교수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안철수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나갔다. 그는 '안철수 노선'을 2012년 대선에서부터 2016년 신당 창당 전까지와 신당 창당 이후부터 2017년 대선까지로 나누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전자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다른 무엇도 아닌 모호한 중간자"였다. 그리고 후자의 시기에는 "중도 보수의 지향성"('보수화 전략')을 분명히 했다.
"이는 그가 신당을 창당하며 선언했던 '낡은 진보 청산'이라는 담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런 노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좀더 분명히 정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질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하며 낡은 진보를 청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뒤에 나타난 행보는 반사이익을 누리는 데 머물렀다."(238-239쪽)고원 전 교수는 "우선 안철수는 낡은 진보 청산을 외치면서 일정 정도 수구세력의 노선을 닮아갔다"라고 지적했다. 그 근거로서 지난 대선에서 사드의 한반도 배치 찬성, 국방비 증액 공약, 북한 주적 발언 등을 들었다. 수구세력의 노선에서 가장 중요한 '안보'에 초점을 맞추면서 보수 지향성을 강화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