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캐나다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대회. 금메달을 딴 캐시 프리먼은 경기규칙을 어기고 호주 토착민 깃발을 흔들었다.(책속 사진 설명)
산지니 제공
또 다른 사진 한 장. 사진 속 육상 선수는 호주의 캐시 프리먼(아래 프리먼)이다. 그녀는 21세이던 1994년에 캐나다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대회에 호주 대표로 출전, 400m 육상경기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다. 이것으로 일약 호주의 영웅이 된다.
그런데 프리먼은 우승하는 순간 그 누구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던 행동으로 호주인들은 물론 관중들을 놀라게 한다. 호주 토착민 깃발을 호주 국기와 함께 들고 트랙을 돈 것. 바로 이 사진이다.
경기 규칙에 어긋난 행동인 동시에 호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이었다. 호주 팀 감독은 "며칠 뒤에 있을 200m 경기에서는 만약 우승해도 절대 그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프리먼은 다시 같은 행동을 하고 만다.
"이것은 내 경기다. 그러니 누구도 내가 토착민이라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표현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62쪽) 그리고 오히려 이처럼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 무엇, 그에 대한 완강하며 확고한 뜻을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이다. 프리먼의 행동은 사실은 저항이자 시위였다.
캐시 프리먼은 왜?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경우에 따라 우승이 취소될 수도 있는,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인데 말이다. 이해하려면 호주의 역사를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한다.
유럽인들이 신대륙 탐험이란 미명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토착민)들을 쫒아내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처럼 호주도 유럽인들의 식민지화에 이은 집단 이주로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유럽인들의 이주 후 영국인들의 호주 토착민 탄압은 더욱 심했다고 한다.
호주 토착민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런데 호주 정부는 토착민들의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수용소에서 자라게 하거나, 백인 가정으로 입양해 키우게 하는 정책을 편다. 토착민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려는 교화정책의 일환이었으나 토착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절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1800년대 말부터 1970년까지 정책은 계속됐고, 이로 대부분의 토착민 아이들은 신체적·정신적 학대와 강제노역으로 인한 고통 속에 자랐다고 한다. 이들을 호주의 '도둑맞은 세대' 또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프리먼도 희생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녀를 포함한 수백만의 호주 토착민들이 비인간적인 차별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양부모인 백인 부모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한 그녀는 열 살 때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한다. 하지만 메달을 받지 못한다. 프리먼이 받아야 할 메달이 백인 소녀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처사는 그녀가 토착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먼의 저항은 당시 호주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6년 뒤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2000년)에서 프리먼이 같은 행동을 해도 더 이상 6년 전과 같은 혼란이나 충격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행동 덕분에 호주인들이 자신들 역시 가해자이지만 부정하고 외면했던 호주 토착민들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프리먼의 토착민들의 인권을 위한 강경한 저항은 호주인들의 공감을 얻는다. 그리하여 결국 시드니 올림픽 8년 뒤인 2008년, 호주 총리는 프리먼의 요구를 수용한다. 동시에 호주 토착민들에게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