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서당 전경봉화 창녕성씨 종택으로 1613년 성이성이 지었다. 굽은 소나무는 성이성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나무로 500년 되었다.
김정봉
계서의 아버지 성안의(1561-1629)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계서는 남원에서 17세까지 4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33살에 문과에 급제, 두 번의 어사를 지냈다. 1639년, 45세에 드디어 호남 암행어사로 남원에 '출두'했다. 남원을 떠난 지 28년 만이다.
계서의 이 짧은 이력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계서는 남원에 출두할 당시 스승 조경남(1570-1641)을 만나 어릴 적 남원에서 있었던 처자와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한다. 조경남이 이 얘기를 듣고 꾸민 이야기가 춘향전이라는 것이다.
돌담과 어우러진 창마 고택들
길은 물 따라, 물은 길 따라 흘러, 내성천을 두어 번 건너니 마을 앞이다. 창마마을은 오록(梧麓)마을로 불리다가 마을 앞에 큰 창고가 생기면서 창촌(倉村), 창마로 불렸다.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풍산김씨 노봉 김정(1670-1737)이 이웃마을 오전리에 살던 팔촌형 집에 들렀다가 이곳 터가 너무 좋아 들어왔다는 말이 있다. 사람 눈은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내 눈에도 창마의 산세나 물세는 사람들에게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게 보였다.
마을 앞 솔밭이 그윽하다.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하는 비보(裨補)숲이다. 노봉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솔씨를 받아다 심었다 한다. 봉화에서 쌔고 쌘 것이 춘양목인데 제주솔을 심은 이유가 있었던 게다.
마을 위에는 갈봉산이, 앞에는 만석산과 천석산이 창마를 둘러싸고 있다. 산 아랫마을이라 돌이 많았던 게지. 마을담은 돌담이다. 돌 색깔은 왜 이리 까무잡잡한지. 노봉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제주 까만 돌을 보고 자신이 살던 마을을 꽤나 그리워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