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후마니타스
문제는 '무조건적인' 침묵이다. 조직의 명운이 달린 결정에 있어, 무조건 자신의 안위만 신경 써 침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 사회로 친다면, '알아야 할 정보'를 모르고, 잘못된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가 그랬다. 극단적 전체주의와 배타주의, 그리고 동조와 침묵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침묵이 종종 폐해를 야기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을까? 가장 분명한 방법은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배적인 정설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P.61.
사람들이 이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명제 자체도 추상적이다. 저자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양한 시민적 자유의 보장을 동조의 압력 해방 장치로 예를 든 이유일 테다.
그중에서도 언론의 자유는 특히 필요하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자들로부터 시민의 공간을 만든다. 시민은 언론을 통해서 다양한 이견을 표현하고, 검증받는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집단 혹은 시민은 자신의 의사에 반(反)하는 의견을 접하며 자신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 A라는 의견과 B라는 의견은 언론의 자유가 만든 공간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완결성을 높일 수 있다.
'내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말한 것이 유익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장려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이견이 아니라 합리적인 견해 혹은 올바른 종류의 이견이다. 유익한 결정을 산출하고 잘못된 쏠림 현상의 위험을 줄이려면,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P.152.
극단을 향해 달리는 사회와 집단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만 '이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합리적 주장의 건설적 대결과 토론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책에서는 미국의 1961년 쿠바 침공(피그스 만 침공)을 예로 든다.
쿠바 침공이 실패한 후, 존.F.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침공에 대해 한탄한다. 존.F.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침공에 임할 때, 그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전한 이는 없었다. '온건파'라는 꼬리표가 자신에게 붙을까 무서워한 참모들은 아무도 쿠바 침공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건설적 토론이 보장된 상황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읽은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느낀 감회는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읽으면서 다시 바뀌었다. 생계를 위해 얘기를 못 한 사람들, 생계에서 자유로운 아이의 용기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견 표출이 자유로운 사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거벗은 임금님>의 궁극적 문제는 이견에 관대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견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져 서로를 반목하기보단, 타인(타 집단)의 의견을 이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견(異見)은 '다른 의견'이지 '틀린 의견'이 아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책이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 개정판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후마니타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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