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내 인생' 낙태죄 협박 장면에 시청자 분노

[스팟인터뷰] 한국여성민우회 제이 활동가 "미디어가 '낙태=나쁜 일'로만 묘사"

등록 2018.01.22 18:49수정 2018.01.22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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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한 장면. 극중 서지태(이태성 분)는 이수아(박주희 분)가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병원에 찾아와 "신고한다, 그거 불법인 거 알지"라고 말한다.
KBS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한 장면. 극중 서지태(이태성 분)는 이수아(박주희 분)가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병원에 찾아와 "신고한다, 그거 불법인 거 알지"라고 말한다.KBS

"(낙태하면) 신고한다. 그거 불법인 거 알지?"

지난 20일 방영된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한 장면. 예정에 없던 아이가 생기자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아내에게 "신고한다"고 협박하는 남편이 등장한다. 특히 이 상황 뒤에 이어지는 "우리들 행동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지자는 거야"라는 남편 대사는 은연중에 낙태를 '무책임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이 장면을 본 많은 여성이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 거냐", "공영방송에서 낙태죄를 협박의 도구로 이용하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며 SNS 상에 분노를 터트렸다.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라거나, 비판 목적으로 이런 대사를 썼다고 보기도 어렵다. 가난한 비혼주의자였지만 '아이를 안 낳는 조건'으로 결혼한 남편 서지태(이태성 분)가, 막상 아이가 생기자 변화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고'까지 운운하며 아이와 함께 가족을 꾸리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에 대비해, '낙태와 이혼 중에 선택하라'는 아내 이수아(박주희 분)는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낙태 수술은 하루 3000건(대한산부인과의사회 추정)에 이르지만, 낙태죄로 기소되는 경우는 1년에 10건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됐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낙태죄'는 여전히 여성들의 자기 결정권을 위협한다. 낙태가 '죄'라는 인식을 견고히 유지해주며, 남성이 여성에게 강제로 출산을 종용하거나, '만나주지 않으면 신고한다'는 식의 협박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낙태죄 협박'이 '아기를 낳기 위한 고육지책'인 양 묘사하는 <황금빛 내 인생>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제이 활동가는 22일 <오마이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신고한다는 협박이) 가해행위로서의 의미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협박에 여성이 영향 받는 상황이 시청자들은 부당하고 분노스럽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검은 시위가 전국으로 환산되는 가운데 2016년 10월 30일, 대구에서도 3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 낙태죄 폐지를 요구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검은 시위가 전국으로 환산되는 가운데 2016년 10월 30일, 대구에서도 3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 낙태죄 폐지를 요구했다.조정훈

이어 제이 활동가는 "미디어가 갈등 구도에서 임신중절은 무책임한 일이자 범죄이고, 아이를 낳는 것은 책임감 있는 일이라는 프레임으로 재현해왔다. <황금빛 내 인생>도 그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예전에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대해서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면, 이제는 개인들이 살고 싶은 삶을 지원하고 권리를 지키는 방안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헌법소원 위헌심판이 있는 만큼 낙태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와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여성단체들이 힘쓰겠다"고, 앞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 방향을 밝혔다.


다음은 제이 활동가와의 일문일답 내용.

"낙태죄가 협박 도구가 되는 사례, 버젓이 존재하는데..."


- "낙태하면 신고한다"는 <황금빛 내 인생> 대사, 어떻게 봤나?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비슷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파혼하는 상황에서 애를 낳아달라고 협박하고, 결국 남성이 신고해서 여성이 고통받은 적이 있다. 신고한다고 협박하면서 계속 만나달라는 사례도 많았다. 낙태죄가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에서 이런 현실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여태까지 미디어에서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갈등 상황을 만들고, 아이를 낳는 것은 책임감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책임하고 범죄라는 프레임으로만 그리고 있다."

- 미디어가 낙태에 대해선 평면적으로 묘사한다는 이야기인가?
"임신중절 하려고 했으나 낳으니까 너무 예뻐서 축하받으며 키웠다든지, 강제로 임신중절한 여인이 분노의 화신으로 등장한다든지, 임신중절 사실이 엄청나게 불행한 사실로 등장하는 것 등등이다. 임신중절은 무조건 '죄', '나쁜 일'로만 인식시키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을 드라마에 반영할 때 어떤 관점에서 반영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도 있다. 또 법적인 정의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신고한다'는 말을 '가해 행위'로서 재현할 수도 있지 않은가."

- <황금빛 내 인생>에 여성이 왜 분노했을까? 
"'신고한다'는 협박이 여성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부당하고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이다. '협박 행위'가 왜 문제인지는 이 드라마 속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시청자들에겐 '낙태는 불법이다' 정도로 전달될 뿐이다.

임신한 여성들이 겪게 되는 감정이나 고통에 대해선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낳아서 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기가 '옜다 물건이다'하면서 줄 수 있는 건가. 미디어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이 임신 기간 여성의 감정, 육체적인 경험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게 법에도 반영된 것이다."

- 낙태죄 협박 사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나?
"이전에 민우회에서 주요한 사례만 정리한 적이 있다. 만나주지 않아서, 금전적인 갈등이 생겨서, 소송 문제가 생겼을 때 남성들이 임신중절 사실을 무기처럼 이용한다. 심지어 자연유산이 된 경우에도 의심하면서 낙태죄로 고소한다며 괴롭힌 적도 있다."

 왜낙폐2탄
왜낙폐2탄한국여성민우회

 왜낙폐 2탄
왜낙폐 2탄한국여성민우회

-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 돼 있음에도 왜 이런 협박이 계속될까?
"그럼에도 법적 효력이 없지는 않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게 협박 사례 아니겠는가. 법의 효력은 낙태한 여성을 곧바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을 하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서 판단하고, 지원받고, 양질의 의료를 취해야 할 텐데, (낙태죄가 존재하면)그런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에 놓일 수도 있게 된다."

- 여성의 삶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가 않다.
"현실 자체가 '생명 대 여성의 삶' 이런 식으로 양자택일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분법화 되어있지 않은, 아이와 연결된 부분이 있는 여성들의 복잡한 삶을 그대로 이해하고, 여성들이 자기의 삶을 위해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전에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대해서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면, 이제는 개인들이 살고 싶은 삶을 지원하고 권리를 지키는 방안으로 이동해야 한다. 여성은 더 이상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 앞으로 민우회 등 여성단체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느끼는 임신 공포, 낙태죄로 인해 임신하면 여성만 책임지는 구조에 대한 부당함을 크게 느끼고 있다. 앞으로 헌법소원 위헌심판이 있는 만큼 낙태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와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확산하는 데 주력하려고 한다. 특히 앞으로 다양한 연령대와 지역에서의 낙태죄 폐지 여론을 높이는 장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황금빛내인생 #낙태죄 #임신중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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