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1536년(중종 31년)~1584년(선조 17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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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성리학의 정신이 바로 군자의 정신을 구체화하는 제도개혁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는 이론적으로 성리의 원리를 밝히는 것만이 도학(道學)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도학이라고 말했다. 군자인지 소인인지의 윤리적 비판에 머무르고 있는 당대의 사림에게 율곡은 끊임없이 구체적 개혁의 비전을 제시했다.
이이가 제시한 개혁과제는 '민생'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당연하게도 민생과 직결된 구체적인 세금 개혁까지 나아간다. 율곡 이이는 정암 조광조가 제시했던 수미법(收米法)을 시급하게 시행해야 할 것을 거듭 주장했다.
거듭된 반정으로 공신으로 책봉된 많은 훈구세력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땅이 없는 백성들은 공납의 부담과 방납의 폐단이 겹쳐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조광조는 무리한 공납의 현물납부를 보유 토지를 기준으로 쌀로 납부하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한 것이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수미법(收米法)을 현실 가능한 개혁정책으로 제시했을 뿐 아니라 제도개혁의 사상사적 집대성을 시도했다. 이이는 주기론(主氣論)을 펼쳐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내적 정합성을 넘어 실천으로 천세합일(天世合一)의 경지를 추구했다. 당연히 그의 성리학은 실천과 개혁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퇴계와 더불어 성리학을 집대성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여겨지는 율곡은 특히 구체적인 제도개혁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8년 대한민국은 율곡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는가안타깝게도 선조는 율곡의 뛰어난 문장과 천재적인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지만 구체적인 개혁에는 어느 것 하나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선조에게는 이이만큼의 문제의식과 시대적 위기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이는 마지막까지 나라 걱정을 하며 1584년 49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임진왜란 발발 8년 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가 주장한 수미법은 한시적으로나마 유성룡을 통해 시행된다. 그러나 상황이 곧 나아지자 선조는 개혁조치를 금방 후퇴시킨다. 조광조와 이이의 외침은 선조 이후 이원익을 비롯한 김육 등의 선비들을 통해 다시 전개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100년 동안 전개되는 대동법 개혁의 시작이었다.
율곡은 당대에 실패한 개혁가였고 그의 외침은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그가 닦아놓은 사상적 기반과 구체적인 개혁의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율곡의 존재가 없었다면 대동법 개혁 논의는 과연 시작될 수 있었겠는가.
중쇠기로 접어든 조선의 현실을 누구보다 앞서 지적하고 위기를 타개할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는 당대 조선에게 하늘이 내린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조선은 건국 이후 최대의 재앙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임진왜란이다.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재앙으로 그 책임을 묻게 된다. 역사가 거듭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대동법의 시조(始祖)격인 수미법은 곧 토지를 부과기준으로 삼은 오늘날의 '토지보유세'라고 볼 수 있다. 율곡 이이의 개혁 제시는 현학적이고 이해되지 못해서 시행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당대의 기득권이 의도적으로 그의 주장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촛불시민혁명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율곡 이이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는가. 당시 율곡에게는 없었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적폐 청산의 물꼬를 틀고 구체적인 제도개혁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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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이 존엄하다는 믿음으로 태어나면서 모두에게 주어진 토지권과 주거권을 보장하는 정신입니다. 희년정신을 한국 사회에 전파하기 위해 토지배당,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희년함께 희년실천센터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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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한민국이 율곡 이이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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