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백석의 시

영문 번역이 함께 실린 <백석 시선>을 읽고

등록 2018.01.29 11:32수정 2018.01.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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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살던 지인이 한국에 나왔을 때 하던 말이 기억난다. 타지에 있으면서 가장 서러울 때가 몸이 아플 때인데 그때 엄마가 해주시던 특정 음식을 먹으면 금세 일어날 것만 같았다고 말이다.

그녀는 향토색과 음식의 독특한 손맛을 자랑하는 남도 출신이었다. 음식은 단순히 미각의 기억만이 아니라 함께 했던 시간, 공간이 기억과 향기, 문화적 정서적 기억을 이끌어낸다. 이제는 맛볼 수 없는 작고한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운 경우도 음식과 함께 느껴지는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 체취가 어우러져 그리움의 빗장을 열어젖히기 때문 아닐까.


나의 정서적 갈증과 메마름, 자유에의 갈망이 깊어지면 늘 불려나오는 시인들이 있다. 소월, 백석, 정지용, 신동엽, 김남주가 그들이다. 그 중에서 정신적 갈증과 물리적 갈증을 함께 풀어줄 시인을 소환하라면 누구나 백석을 떠올리지 않을까.

백석은 토석적인 언어로 음식에 담긴 정서를 소환하고 분위기를 전하며 맛과 냄새까지 전하는 시인이다. 토속적 언어로 토속 음식과 가족과 친척들, 친구와 고향의 정서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은 백석시가 지닌 장점이다.


백석 시선 피터립택이 옮긴 백석의 시
백석 시선피터립택이 옮긴 백석의 시K POET 아시아

백석 시선(아시아)은 피터 립택이 옮긴 영문 번역이 함께 실린 백석 시집이다. 번역은 아무리 잘해도 그 나라 언어가 지닌 뉘앙스를 절반도 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의 토속어가 지닌 맛깔스러운 언어의 느낌을 그 어떤 언어로 전달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백석의 시가 아시아 시선으로 영문으로 번역되어 더 많은 이들이 백석의 시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백석은 모든 것을 냄새로 소환하는 재주를 지녔다. 새 옷의 냄새, 콩고물 떡 냄새, 나뭇가지 태우는 냄새, 시렁에 걸린 메주 냄새로 시를 접하는 독자의 개인적인 추억과 기억을 소환하게 만든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당초가루)
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내음새 탄수(석타과 물)
또 수육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삿자리 깐 방) 쩔쩔 끓는 아르굴(아랫못)
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 국수 일부 55~56

This pale, soft, plain, subtle thing, what is it
on this winter night, with impeccably ripened
radish-water kimchi, with that beautifully bitig
red-pepper powder, with that flavorful fresh pleasant

And that smell of smoke, that smell of vinegar, and that
smell of boiled beef boiled in beef broth, the smel that
fills the reed-matted with the spit and seethe of boiling,
that warm welcoming spot near the fired floor, what is that



그의 시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한겨울 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를 떠다 놓고 고구마를 먹던 어느 겨울날, 이불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다리를 넣고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유년의 어느 소박하고 따뜻했던 겨울날을 소환해 낸다.

백석의 시가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토속어가 지닌 아름다움과 정겨움을 맛보게 한다는 거다. 표준어와 달리 토속어에는 그 지방의 정서와 문화 향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에 엄매는 엄메들끼리 아르간(아랫방)에서들 웃고 이야기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웃방)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께돌림(주발 뚜껑 돌리기) 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등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계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무새우국)을 끓이는 맛잇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 중 20쪽

백석이 소환한 시에는 상실의 아픔, 돌아가거나 다시 맛볼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의 소환이 주를 이룬다. 그가 지낸 시절이 우리의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던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더욱 유년의 기억을 통해 개인의 삶을 다잡으며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소환할 수 있는 유년의 정서와 음식, 추억, 함께 한 사람들의 내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기계가 인간의 삶을 대치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와도 인간이 지닌 정서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굴뚝에 올라가 생존을 외치는 노동자가 있고 거리에서 일터를 지켜달라며 노숙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안의 사람의 냄새, 인간의 정서를 오롯이 지켜낼 수 있는 시인들을 불러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과거의 시간과 흘러간 물뿐이랴. 그러나 우리는 안다. 관계는 또 다른 인연의 끈으로 새로운 기억의 탑을 쌓고 추억을 엮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놓지 않는 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기억의 저장소 어딘가에서 소환될 그날을 기다릴 것이기에.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50쪽

백석 시선

백석 지음, 피터 립택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 2017


#백석 #토속어 #고행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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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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