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 입구로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사진 속은 온천 내부의 모습이다.
남지우
말하고, 드러내는 육체는 야하지 않다온천에서 멍을 때리면서 생각한 게 있다. 야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야하다고 학습해왔고, 특히나 여성의 육체는 일상적인 성적 대상화와 맞물려 더욱 야한 것이 되었다. 가슴이나 성기 등 '여성'의 특성이 부각되는 신체 부위는 그중에서도 제일 야한 것이 되어버렸다(남성의 몸과 남성기는 '야함'의 속성이 덜 부여된다. 남성의 탄탄한 몸은 '건강함' '용감함' '탄탄함' 등의 긍정적인 수식으로 묘사되고, 돌출형인 남성기 역시 '은밀하다' 여겨지는 여성기에 비해 더 많이 노출되니까).
사실 우리 육체 그 자체는 야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상이 야해지려면 '맥락'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을 둘러싼 줄거리, 분위기, 음악, 혹은 누군가의 페티쉬 등이 맥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나인 하프 위크> 라는 영화를 보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유혹적이고 성적인 자극에 따라 파프리카와 달걀 노른자까지 섹시하게 연출된다. 쉽게 말해서 분위기와 맥락 속에서 연출된 '파프리카'가, 우리 '육체' 그 자체보다 더 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연출되지 않은 우리 육체는 야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몰카가 설치되는 곳을 보면, 여자화장실을 필두로 강의실, 지하철 등 무궁무진하다. 나는 계속되는 몰카의 범람에 분노하기 앞서 솔직하게 든 심정이 있다. 아니, 여자들이 용변 보는 게, 그냥 강의 듣는 게, 계단 올라가는 게, 그게 야한가? 그걸 보고 싶나? 그걸 왜?
그러한 일상조차 야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몰카가 제작되고 소비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혹은 다수의) 한국 남성들은 왜 그렇게 탈맥락화된 상황에서조차, 다시 말해 맥락과는 상관없이 육체 그 자체에서 야함을 느낄까?
나는 그것이 '생리'라는 단어에조차 청소년들이 부끄럽다거나-야하다고 반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우리의 몸은 밝고, 넓고,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예를 들면 학교) 말해지지 않는다. 몸이 말해지지 않으니, 몸은 은폐되면서 신비화된다. 우리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은 신비롭고 만져질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쌓이고 쌓인다.
돌이켜보면 자궁, 난소, 나팔관 이런 명칭은 학창 시절부터 많이 배웠는데, 여성의 성기를 순우리말로 '보지'라고 부른다는 건 대학교 와서 처음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맥락이 없다면 육체는 야해질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그 야한 걸 어떻게 말해! 라고 성급하게 오해해온 건 아닐까?
우리 몸에 대해 말하고 배울 틈도 없이, 극도로 과하게 연출된 육체를 포르노를 통해 먼저 접하고 그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 결국 육체의 실체에 대한 학습은 더욱 느려지는 것이다. 모니터 너머의 허상으로서의 야한 육체를 먼저 인지하다 보니, 실제로는 야하지 않은 그냥 우리 '몸'을 바라볼 용기를 잃는다. 몸의 실체는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아지고 허상으로만 남으며, 그렇기에 우리 몸은 결국 그 자체로 야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나는 포르노 자체가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포르노의 위험성은 의외로 이런 지점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야하지 않은 우리 몸을 당당하게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가정의 책임이고, 공교육의 책임이며,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한 대상화를 성범죄로 이어나가곤 하는 미천한 성의식을 지닌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훈련이다. 독일에서 혼욕 문화가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육체 그 자체는 결코 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인지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간혹 농담거리로 말해지곤 하는 혼탕 문화의 판타지 뒤에는, 이렇듯 건강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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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상관없이 '그냥 벗는' 목욕탕, 야하지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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