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실 제1분과에서 [민주화의 길]을 만든 1.노동진 2.박일환 3.윤석인 4.임경석. 정책실 제2분과에서 [민중신문]과 각종 자료를 만든 5.김영현 6.한홍구
민청련동지회
상층연대보다 하층연대를 중시하다 새 집행부의 또 하나 역점 사업은 대외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김희택 집행부는 특히 기층 민중과의 연대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즉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합기관인 민통련이나 야당 정치세력과의 상층 연대보다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상층 연대를 사실상 폐기하고 하층 연대를 강화한다는 민청련의 이 입장은 1986년 상반기 투쟁 노선에 반영됐다.
당시는 개헌 투쟁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국회 밖으로 나와 장외 대중운동으로 진출한 것이 그 기폭제가 됐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개최한 데 뒤이어, 5월 말까지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마산, 전주 등의 순서로 개헌 현판식을 주최했다. 야당 정치세력의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은 대규모 대중 동원력을 과시했다. 현판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동안 억눌려 온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모처럼 생긴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뜨겁게 분출했다.
특히 3월 30일 신민당 개헌추진 광주지부 결성대회가 큰 역할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광주 시내에서는 3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중이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항쟁 이후 처음 보는 가장 큰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민통련은 '3.30 선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군사독재를 물리친 다음에 반외세 문제를 해결하며, 당면 투쟁의 슬로건은 군사독재 퇴진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통일시키고, 그를 위해 신민당과의 적극적 제휴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청련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 제13호 논설을 통해, 세 가지 점을 들어서 민통련의 입장을 비판했다. 첫째, 반독재 단독구호를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독재 민주화의 과제와 반외세 자주화의 과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목표이므로 반독재 슬로건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둘째, 야당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비판했다. 신민당은 독재자 일 개인이나 일부 그룹과는 이익이 상반되지만, 외세와 군부 전체와는 결국 유착될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개헌집회의 목표는 전략적 공세기가 아니라 수세기를 전제로 하는 관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재 타도를 직접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바른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훈련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학청연대의 이상과 현실민청련은 민통련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에 민주혁명의 핵심역량으로 간주되고 있는 노동운동 및 강력한 대중 동원력을 갖고 있는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민청련은 이것을 '노학청연대'라고 불렀다. 광범한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하층 연대였다. 민청련은 이 연대를 중시했고, 그에 책임 있게 참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민청련의 의도와는 달리 노학청연대는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사정과 연관돼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진영은 [노동자신문]과 [선봉]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노동자신문] 그룹은 투쟁성과 강고한 규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운동의 방향을 선도하는 정치노선의 제시에 소홀하며, 운동 진영의 동료 단체들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패권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선봉] 그룹은 운동 진영의 연대에 대해서는 훨씬 유연했다. 하지만 이 그룹은 '반제반파쇼노동자투쟁위원회(반반노투)'라는 공개 투쟁기구를 내세웠으나 투쟁성과 규율의 측면에서는 실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학생운동 진영도 나뉘어 있었다. 1986년 4월 28일, 서울대 학생들이 전방입소 훈련을 반대하며 신림사거리에서 시위하던 중 건물 옥상에서 시위를 이끌던 김세진, 이재호 두 학생이 몸에 신나를 뿌린 뒤 "반전반핵 야키 고 홈"을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 안에 반외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이 주장하는 반외세직접투쟁론은 외세 문제에 대한 일대 비판과 자성을 불러일으킨 점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개헌투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연대가 가능한 파트너는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민청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