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무릅쓰고 5월투쟁에 헌신한 청년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9]

등록 2018.02.06 09:38수정 2018.02.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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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영업부, 산악부라고 부른 세 가지 조직

AB논쟁의 결과 조직이 반 토막 났다. 문제가 심각했다. 단지 구성원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은 회원들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1986년 3월, 제6차 총회를 통해 등장한 김희택 새 집행부가 그 일을 단행했다.

먼저 조직체계에 손을 대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했다. '규율과 헌신'을 전제로 하는 회원의 '정예화'가 목표였다. 그 결과 기존의 비공개 계반 조직은 세 종류의 새로운 조직 형태로 재편됐다. '동창회' '영업부' '산악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조직은 민청련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기간 조직'이라고 불렸다.

동창회란 기존의 계반과 동일한 조직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로서 회사원 등으로 생계를 위해 일상생활을 하는 이들을 조직원으로 삼았다. 이들은 1주일에 1회 이상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회비를 거두고, 정세와 전술에 관해서 토론하고, 거리와 주택 밀집 지역에 유인물을 살포하고, 시위 현장에 참여하는 등 기존 계반에서 수행하던 활동을 그대로 계승했다.

영업부는 제6차 총회에서 처음 출현한 조직형태였다. 기존에 해오던 계반 활동에 더하여 노동 현장에 대한 지원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 대중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민지투'라고 불렀는데, '민중운동지원투쟁'이라는 말의 줄임말이었다. 이 조직은 민청련의 기간 조직을 확장하고 다양화하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 성패 여부가 민청련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 조직의 총책임은 고려대 76학번 출신 이승환이 맡았다.

산악부는 민중운동 현장으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공장이나 빈민운동 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회원들을 묶었다. 현장으로 이전하려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이탈을 막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청련이 직접 적극적으로 그 과정을 조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회원들 내부에 팽배해 있는 노동현장 지향 열기를 조직 내부에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기간 조직과 함께 '스텝 조직'이 편성됐다. 종래 상임위원회 산하에 분과 형태로 조직됐던 비공개 기구들을 이 개념으로 새로이 재편했다. 기간 조직이 민청련의 뼈대를 구성하는 종적 조직이라고 한다면, 스텝 조직은 집행부의 각 기능을 확장하는 횡적 조직이었다. 정책실, 민중신문팀, 유인물을 제작하는 홍보위원회 등이 이 범주에 속했다.


  민청련 6차총회에서 채택한 성명서(왼쪽)와 6차 총회 보고서(오른쪽)
민청련 6차총회에서 채택한 성명서(왼쪽)와 6차 총회 보고서(오른쪽)민청련동지회

말을 잘해서 '노(가리) 선생'이라고 불리운 이범영

정책실은 장기 수배중이던 이범영 부의장이 맡았다. 그는 경찰의 집요한 수배망에 쫓기면서도 쉼없이 민청련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 '노선생'이라고 불렸다. 수배중이기 때문에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불려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성씨 중에서도 하필이면 '노' 선생이라고 불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노가리'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노가리란 말을 막힘없이 조리 있게 풀어놓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였는데, 그는 조성된 정세의 성격과 당면 투쟁의 전략⋅전술에 관하여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논리를 갖춰서 설득력 있게 발언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실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제1분과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간행하는 팀이었다. 진재학 상임집행위원이 그를 관장했다. 노동진, 윤석인, 박일환, 임경석, 김용민, 노남기 등이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객관정세 분석팀과 주체정세 분석팀으로 나뉘어서 정례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은 통상 1주일에 한번 씩 개최했으며, 회합 장소로는 신촌 일대의 경양식 집이나 카페를 선호했다. 그 당시 경양식 레스토랑은 값이 비싸지 않은데다 테이블 별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여섯 사람이 돈까스 하나씩 주문하고서 두세 시간씩 은밀한 얘기를 나누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정책실 제2분과는 유기홍 상임집행위원이 이끌었다. 김영현, 윤형기, 한홍구 등이 그 주요 멤버였으며, 번잡한 재래시장 허름한 건물의 한 귀퉁이에 사무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장통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낯선 사람들이 출입하기에 적당했다. 이 팀은 정책 관련 자료를 생산하여 교육 및 홍보에 활용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이따금 제1,2 분과의 합동 모임도 갖곤 했다.

 정책실 제1분과에서 [민주화의 길]을 만든 1.노동진 2.박일환 3.윤석인 4.임경석.  정책실 제2분과에서 [민중신문]과 각종 자료를 만든 5.김영현 6.한홍구
정책실 제1분과에서 [민주화의 길]을 만든 1.노동진 2.박일환 3.윤석인 4.임경석. 정책실 제2분과에서 [민중신문]과 각종 자료를 만든 5.김영현 6.한홍구 민청련동지회

상층연대보다 하층연대를 중시하다

새 집행부의 또 하나 역점 사업은 대외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김희택 집행부는 특히 기층 민중과의 연대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즉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합기관인 민통련이나 야당 정치세력과의 상층 연대보다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상층 연대를 사실상 폐기하고 하층 연대를 강화한다는 민청련의 이 입장은 1986년 상반기 투쟁 노선에 반영됐다.

당시는 개헌 투쟁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국회 밖으로 나와 장외 대중운동으로 진출한 것이 그 기폭제가 됐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개최한 데 뒤이어, 5월 말까지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마산, 전주 등의 순서로 개헌 현판식을 주최했다. 야당 정치세력의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은 대규모 대중 동원력을 과시했다. 현판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동안 억눌려 온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모처럼 생긴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뜨겁게 분출했다.

특히 3월 30일 신민당 개헌추진 광주지부 결성대회가 큰 역할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광주 시내에서는 3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중이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항쟁 이후 처음 보는 가장 큰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민통련은 '3.30 선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군사독재를 물리친 다음에 반외세 문제를 해결하며, 당면 투쟁의 슬로건은 군사독재 퇴진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통일시키고, 그를 위해 신민당과의 적극적 제휴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청련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 제13호 논설을 통해, 세 가지 점을 들어서 민통련의 입장을 비판했다. 첫째, 반독재 단독구호를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독재 민주화의 과제와 반외세 자주화의 과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목표이므로 반독재 슬로건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둘째, 야당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비판했다. 신민당은 독재자 일 개인이나 일부 그룹과는 이익이 상반되지만, 외세와 군부 전체와는 결국 유착될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개헌집회의 목표는 전략적 공세기가 아니라 수세기를 전제로 하는 관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재 타도를 직접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바른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훈련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학청연대의 이상과 현실

민청련은 민통련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에 민주혁명의 핵심역량으로 간주되고 있는 노동운동 및 강력한 대중 동원력을 갖고 있는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민청련은 이것을 '노학청연대'라고 불렀다. 광범한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하층 연대였다. 민청련은 이 연대를 중시했고, 그에 책임 있게 참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민청련의 의도와는 달리 노학청연대는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사정과 연관돼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진영은 [노동자신문]과 [선봉]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노동자신문] 그룹은 투쟁성과 강고한 규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운동의 방향을 선도하는 정치노선의 제시에 소홀하며, 운동 진영의 동료 단체들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패권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선봉] 그룹은 운동 진영의 연대에 대해서는 훨씬 유연했다. 하지만 이 그룹은 '반제반파쇼노동자투쟁위원회(반반노투)'라는 공개 투쟁기구를 내세웠으나 투쟁성과 규율의 측면에서는 실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학생운동 진영도 나뉘어 있었다. 1986년 4월 28일, 서울대 학생들이 전방입소 훈련을 반대하며 신림사거리에서 시위하던 중 건물 옥상에서 시위를 이끌던 김세진, 이재호 두 학생이 몸에 신나를 뿌린 뒤 "반전반핵 야키 고 홈"을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 안에 반외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이 주장하는 반외세직접투쟁론은 외세 문제에 대한 일대 비판과 자성을 불러일으킨 점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개헌투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연대가 가능한 파트너는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민청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이었다.

 민민학련 창립선언문(위). 1986년 4월 29일 서울시내 2천여 명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개최한 민민학련 창립결성대회 중 경찰 진입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아래)
민민학련 창립선언문(위). 1986년 4월 29일 서울시내 2천여 명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개최한 민민학련 창립결성대회 중 경찰 진입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아래)민청련동지회

결국 민청련은 개헌투쟁의 슬로건이 일치하고 연대가 실제로 가능한 파트너들과의 협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반반노투와 학생운동의 민민학련, 그리고 민청련 세 행위 주체가 연대해 5월투쟁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몇몇 청년들을 더하여 5월 15일, 6개 단체 연합으로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를 결성하고, 성명서와 메시지를 발표했다.

5월투쟁의 꽃은 5월 17일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수행한 시위운동이었다. 이 시위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노학청 연대에 참여한 세력은 공동의 논의 테이블을 조직했다. 시위운동을 준비하는 테이블에서 중시된 것은 특히 '초동의 강고함'이었다. 시위 최초 주동자들이 확실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야만 시위 대열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청련 회원들은 무언가 주장을 하려면 실천을 담보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노학청 연대로 시위를 조직하려면 민청련에서도 대학생들처럼 시위를 주동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탄압 국면이 도래하기 전에는 시위를 주동해도 구류 처분을 감수하는 정도만 각오하면 됐으나, 이제는 달랐다.

앞서 5월 3일 신민당이 주최하는 개헌현판식 인천대회에 학생운동이 대거 참여하면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격돌이 벌어졌다. '5.3인천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백 명이 넘게 구속됐고 정부의 시위에 대한 대응은 초강경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구속될 게 뻔했다. 민청련의 임원과 회원들은 이 문제로 깊이 고민했다. 결국 비공개 집행부에 속한 상임집행위원 두 사람이 희생을 무릅쓴 결심을 내렸다. 진재학과 최경환이었다.

대회 명칭은 「광주학살원흉처단과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를 위한 민중대회」로 정해졌고, 시위 현장에 뿌려진 전단에는 '5월 17일 오후 4시 파고다공원'에서 개최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시위 개최지로 선정된 곳은 종로 2가 길거리였고, 시간은 오후 7시 30분이었다.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민민학련 측을 대표하여 남녀 대학생 2인이 신혼부부를 가장하여 종로2가 YMCA 호텔에 투숙했다. 둘 다 성균관대 재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약속된 시간에 호텔 창문을 통해 플래카드를 내려뜨렸고,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에 호응하여 가두에 배치된 민청련의 두 '야사'(야전사령관)가 행동에 나섰다.

 시간이 각각 7시30분과 4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 이름의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 앞면(왼쪽)과 민청련에서 제작한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오른쪽)
시간이 각각 7시30분과 4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 이름의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 앞면(왼쪽)과 민청련에서 제작한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오른쪽)민청련동지회

5월투쟁의 두 야전사령관, 진재학과 최경환

진재학은 YMCA 호텔 앞에서 10여 미터 뛰어나가며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쳤다.

"광주학살 원흉을 처단하라! 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하자!" 고함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최경환은 지하철역 출입구 덮개 위에 올라가서, 경찰에 잡힐 때까지 현장 시위를 지휘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문 가판대를 딛고 출입구 덮개에 몸을 걸쳤으나, 한 번에 올라서지 못하고 버둥댔다. 결국 그는 사복 경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고, 구호를 외치면서 끌려갔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두 동료의 모습을 보면서 종로2가 가두에 점점이 모여 있던 민청련 회원들은 내면 의식의 폭풍우를 겪어야 했다. 대의에 헌신하다가 희생되는 동료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료의 용기에 진정한 경의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솟아오르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날 시위는 사복 경찰이 쫘악 깔려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감행한 과감한 행동이었다. 경찰 은 이미 파고다 공원과 종각 지하철 역 등에 정사복 경찰 22개 중대 3천여 명을 배치한 상태였다. 시위 현장에서 364명이 연행됐고, 그 중 10명이 구속됐다.

 경향신문 1986년 5월 19일자 사회면 톱기사에 실린 1986년 5월 17일 시위 기사. 10명의 구속자 명단 중 검은테두리 안에 최경환, 진재학 회원의 이름이 있다. 왼편 위에 있는 사진은 진재학(왼쪽)과 최경환(오른쪽). 아래 사진은 당시 종로2가 YMCA 일대 사진
경향신문 1986년 5월 19일자 사회면 톱기사에 실린 1986년 5월 17일 시위 기사. 10명의 구속자 명단 중 검은테두리 안에 최경환, 진재학 회원의 이름이 있다. 왼편 위에 있는 사진은 진재학(왼쪽)과 최경환(오른쪽). 아래 사진은 당시 종로2가 YMCA 일대 사진민청련동지회

5월 투쟁을 끝낸 뒤 민청련은 엄정한 자체 평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노학청 연대와 공동투쟁에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음을 인정했다. 공동투쟁에 임한 세 주체가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표방한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러나 그 슬로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연대 파트너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민민학련과 반반노투의 생각은 민청련과 달랐다. 그들은 개헌투쟁의 성격을 곧바로 헌법제정회의를 소집하여 민중권력을 수립하는 투쟁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민청련은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니며 개헌투쟁을 전술적 투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심각한 차이였다. 슬로건의 외형적인 합치만을 기준으로 삼아 연대를 이뤘던 점에 대해서 자기 반성을 한다고 고백했다.

연대 파트너 선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연대 대상이 됐던 노동운동 세력이란 실제로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노동 현장에 들어가 만든 비공개 정치투쟁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동안 추구해 왔던 노학청연대란 학생운동에 더하여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덧붙인 데에 지나지 않았다. 거창한 관념적 의미 부여에 비해 내용적 실체는 국지적인 범위에 한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청련 #개헌투쟁 #김희택 #이범영 #진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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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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