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쉰들러' 남정식 지서장 공덕비는 왜 세워지지 못했나

의인 행적 기록한 대동청년단 내덕동 감찰부장 장기암과 전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 이창세

등록 2018.02.12 15:38수정 2018.02.1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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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산에 나무 심으러 갑시다."

강서지서장 남정식은 나무와 삽과 괭이를 들고 부지런히 서둘렀다. 나무를 심기 위해 참여한 주민들은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부모산은 해발 23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으로 충북 청주시 강서동에 위치해 있다. 주민들과 보도연맹원들의 작업은 한나절 걸려 마무리되었다. 나무 심기가 끝나자 남지서장은 "오늘 하루 고생했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세요"라고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강서면 보도연맹원 50명은 자신들이 죽음의 땅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줄도 모르고 털레털레 집으로 갔다. 보도연맹원들이 남지서장의 깊은 뜻을 알은 것은 여름 난리에 피난 갔다가 수복된 후였다. 강서면 보도연맹 책임자였던 이상덕은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땅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상덕의 부친은 남지서장이 너무 고마워서 수복 후에 쌀 세 마차 분을 강서지서에 보냈다. 하지만 남정식 지서장은 단호히 거부하고 쌀을 돌려보냈다.

쌀과 새끼돼지를 돌려보낸 지서장들

충북 영동군 용화지서장 이섭진도 남정식 강서지서장 같은 의로운 행동을 했다. 영동경찰서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지서 마당에 모인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수복 후에 자신들이 지서장 덕분에 살아난 것을 안 보도연맹원과 그 가족들이 새끼돼지, 달걀 꾸러미 등을 갖고 지서장 관사에 사례하러 찾아왔으나 모두 돌려보냈다. 남정식과 이섭진 모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충북 청원군(현재 청주시) 강서면과 영동군 용화면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가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서면에서는 1차로 소집된 민병각 등이 지서로 소집된 후 미원방향에서 학살되었다. 용화면 또한 청년방위대원이면서 보도연맹원이었던 30여 명이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두 지서장으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1차로 소집되거나 청년방위대사건으로 묶여 학살된 경우를 제외하면 두 개 면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단 한 명의 희생자를 낳지 않았다.

이들의 의로운 행동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 '지서', '순사(순경)'하면 주민들에게는 경계해야할 대상 1호였다. 해방 직후 경찰들의 민폐는 극에 달해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친일경찰이 청산되지 못해, 국민들이 경찰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했다. 오죽하면 호랑이 온다고 해도 울음을 멈추지 않은 아기의 울음이 순사가 온다고 하면 멈추었겠는가. 하지만 두 지서장의 행동은 남달랐다.


쌀 3700가마를 무상으로 나눠주다

중공군(중국인민해방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또다시 역전되었다. 대한민국 주민들은 다시 겨울 피난을 준비했고, 청원군 강서면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상급경찰기관에서 강서면 휴암에 있던 양곡 창고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양곡 창고에는 쌀 3500가마가 있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전부 불태우라는 것이다. 상급기관에서는 양곡 창고를 태우라며, 석유 한 드럼을 보냈다. 하지만 남정식 지서장은 쌀을 불태우지 않고 주민들과 피난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장기암이 쓴 '공덕비 수립 발기 취지문'에서 참고)


 남정식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장기암이 활동한 내용
남정식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장기암이 활동한 내용박만순

영동군 매곡면 돈대리 출신의 남덕우는 전쟁 전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산하여 매곡면 인민위원장을 했다.  그는 9.28 수복으로 북한군을 따라 월북했다. 그리고 서울정치학원과 빨치산 제526부대(부대장 서윤)에서 유격훈련을 받은 후 1951년 2월 대원 20명을 인솔하여 남하했다. 남하 후 영동군 일대에서 빨치산활동을 전개했다. 용화지서장 이섭진은 당시에 매곡지서장으로 활동했다. 이섭진은 남덕우를 체포하고 나서 그를 살려 줄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이섭진은 남덕우를 설득한 후 김영철 영동경찰서장에게 남덕우가 자수한 것으로 보고했다. 이로 인해 남덕우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섭진은 남덕우를 동생으로 삼고 친동생처럼 지냈는데, 지서장 관사에 방 하나를 내주고 기거하게 했다.(이창세, <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 2007)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시절' 남정식과 이섭진은 사람 목숨을 귀하게 생각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쌀 한 톨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평소의 품성이 전쟁기에 목숨을 걸고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주는 의로운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영동의 쉰들러, 이섭진'을 기록한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

영동과 충북의 경찰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이 쓴 <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이란 책 때문이었다. 이 책은 영동경찰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담은 책이다. 영동경찰 70년 역사를 발로 뛰어 취재해, 재미있게 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이섭진 용화지서장이 영동의 '쉰들러'로 비유된 것이 문제였다.

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 이창세가 쓴 책
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이창세가 쓴 책박만순

책 출판 당시에는 이미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 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도연맹사건은 공론화되었으며,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경찰이나 우익단체 간부에 대한 미담 사례가 소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계 내의 체감온도는 매우 달랐다.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지서장은 '의인'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빨갱이를 살려 준 '문제 경찰'일 뿐이었다. 이창세 정보보안과장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과거사 업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공으로 '표창장'을 받았다. 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경찰계 내부에서는 이섭진 지서장을 '영동의 쉰들러'로 비유한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끝내 세우지 못한 남정식 공덕비

6.25 당시 청원군 강서면장은 홍재봉씨였다. 홍재봉은 1952년도에 청주진입로에 가로수를 심어, 가로수길을 조성했다. 그 후 가로수길은 청주의 명물이 되었다. 장기암(1926~2009)은 전 강서면장 홍재봉을 만나 6.25 당시 남정식의 행적에 대해 물었다.

또한 전쟁 당시 대한청년단장, 보도연맹 책임자를 만났고, 강서면 자연마을 곳곳을 다니며, 남정식의 활동에 대해 증언을 수집했다. 그런 수년의 과정을 통해 남정식 공덕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1997년도에 강서동 일대를 발로 뛰며 여러 단체의 기관장과 주민들을 만나 공덕비 설립을 추진했으나 결국 세우지는 못했다.

장기암은 전쟁 전 대동청년단 내덕동 감찰부장을 역임했고, 수복 직후에는 내덕지서 의용경찰을 했다. 말년에는 우익단체 간부로 활동했다. 하지만 장기암은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이념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접근했다.

전란의 와중에 보도연맹사건을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서장이었고, 대한청년단장과 의용소방대장 이었다. 이들의 의로운 행동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따듯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고 기록해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다.

충북에서는 대표적으로 장기암과 이창세가 그 주인공이다. 한 명은 고인이 되었고, 다른 한명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해 자연인으로서 살고 있다. 의인을 기록한 이들, 의로운 행동을 기억하고 기념하게 한 이들을 '역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남정식 #이섭진 #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 #이창세 #장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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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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