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을 피운 사람들이창세가 쓴 책
박만순
책 출판 당시에는 이미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 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도연맹사건은 공론화되었으며,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경찰이나 우익단체 간부에 대한 미담 사례가 소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계 내의 체감온도는 매우 달랐다. 보도연맹원을 살려준 지서장은 '의인'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빨갱이를 살려 준 '문제 경찰'일 뿐이었다. 이창세 정보보안과장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과거사 업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공으로 '표창장'을 받았다. 장관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경찰계 내부에서는 이섭진 지서장을 '영동의 쉰들러'로 비유한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끝내 세우지 못한 남정식 공덕비6.25 당시 청원군 강서면장은 홍재봉씨였다. 홍재봉은 1952년도에 청주진입로에 가로수를 심어, 가로수길을 조성했다. 그 후 가로수길은 청주의 명물이 되었다. 장기암(1926~2009)은 전 강서면장 홍재봉을 만나 6.25 당시 남정식의 행적에 대해 물었다.
또한 전쟁 당시 대한청년단장, 보도연맹 책임자를 만났고, 강서면 자연마을 곳곳을 다니며, 남정식의 활동에 대해 증언을 수집했다. 그런 수년의 과정을 통해 남정식 공덕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1997년도에 강서동 일대를 발로 뛰며 여러 단체의 기관장과 주민들을 만나 공덕비 설립을 추진했으나 결국 세우지는 못했다.
장기암은 전쟁 전 대동청년단 내덕동 감찰부장을 역임했고, 수복 직후에는 내덕지서 의용경찰을 했다. 말년에는 우익단체 간부로 활동했다. 하지만 장기암은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이념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접근했다.
전란의 와중에 보도연맹사건을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서장이었고, 대한청년단장과 의용소방대장 이었다. 이들의 의로운 행동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따듯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고 기록해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다.
충북에서는 대표적으로 장기암과 이창세가 그 주인공이다. 한 명은 고인이 되었고, 다른 한명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해 자연인으로서 살고 있다. 의인을 기록한 이들, 의로운 행동을 기억하고 기념하게 한 이들을 '역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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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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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쉰들러' 남정식 지서장 공덕비는 왜 세워지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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