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열차 삼등석에서 북한 노동자를 만났다

[서평] '철도 덕후' 기관사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기 <시베리아 시간여행>

등록 2018.02.25 20:01수정 2018.02.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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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시원으로 불리는 바이칼 호수 순환열차.
한민족의 시원으로 불리는 바이칼 호수 순환열차. Wikimedia Commons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혹은 '철덕(철도 덕후)'이라면 타고 싶고 떠나고 싶은 기차가 몇 있다. 매주 한 차례씩 알래스카의 주요 도시인 페어뱅크스와 앵커리지 사이를 왕복하는 알래스카 열차는 평균 시속 48킬로미터로 550km의 거리를 11시간 동안 달린단다.

중국 칭짱철도는 칭하이 성에서 티베트의 랏싸에 이르는 1,142km을 달린다. 특히 전체구간의 86%가 4,000m이상의 고지대로 세계의 지붕을 달리는 열차로 유명하다.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이 있다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며 장장 19일이나 달려 모스크바에 닿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 <시베리아 시간여행>은 철도 기관사가 쓴 18박 19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여행기다. '덕업일치'의 부러운 삶을 살고 있는 23년 경력의 '철덕'답게 책 곳곳에 나오는 철도 이야기가 새롭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9,288km나 되는 세계최장의 철도 길이만큼이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와 사연을 품고 있었다.

 책 표지 - 자작나무 숲길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책 표지 - 자작나무 숲길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후마니타스

시베리아 열차가 머물고 지나가는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 연해주 지방은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이 찾아든 터전이었다.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달리는 열차에 20세기 한국의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타고 내렸고, 1937년 수십만 동포들의 슬픈 디아스포라(이산(離散))의 역사가 담겨있다. 현재 러시아, 중국으로 일하러 오가는 북한 노동자들이 타는 열차이기도 하다.

기차 여행기이지만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참고한 문헌이 참 다양하다.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에서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러시아 예술기행>까지 수 십 권에 달한다. 덕택에 시베리아 철도여행과 이어진 흥미롭고 풍성한 역사·도시·사람이야기를 접했다. 시베리아 철도에 '시간여행'이란 말을 넣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에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를 횡단한 여정이 담겨있고, 2부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모스크바 여행 후 국제 열차를 타고 우리에게 통일조국의 선례를 보여준 독일 베를린을 오갔던 기록을 담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라고 해서 영화 <설국열차>가 떠오르는 눈 덮인 설원과 극한의 추위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여행기는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백야가 있는 시베리아의 여름 풍경이 배경이다.


 치타역에서 기차와 함께 쉬고 있는 남북 노동자들.
치타역에서 기차와 함께 쉬고 있는 남북 노동자들.후마니타스



시베리아 열차 삼등석에서 만난 남북 노동자들 


"통로를 지나려는 순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와 마주친 사람도 눈이 휘둥그레지긴 마찬가지였다. (중략)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남과 북의 여행자를 자연스럽게 섞어 놓았다. 분단 이후 평범한 남북의 노동자들이 이토록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 '횡단 열차 대사건' 가운데
저자와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비좁은 6인실 삼등석을 타게 됐는데, 이 일은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끊임없이 낯선 사람, 이방인이 타고 내리는 시베리아 열차에서 모스크바로 일하러 가는 북한 노동자들을 만난 것이다. 저자나 북한 주민들 모두 처음 눈이 마주치면서 깜짝 놀라고, 아주 잠시 객차 안에 정적이 감돌았지만 분단된 땅의 반대편 사람임을 바로 알아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상적이다.

며칠 간 기차 냉방장치가 고장 났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된다. 저자가 콜라를 건네면서 "동무, 미제의 쓴 물을 마셔 보라우!" 농담을 할 정도로 친해졌지만, 오랜 시간 갈라져온 분단국가에서 생길 법한 '웃픈' 일화가 일상 곳곳에서 터진다. 서울에서 개성이나 평양은 러시아나 중국의 철도 여행 개념으로 보면 코앞을 오가는 것이다. 우리와 북한 주민들은 기껏해야 20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떨어져 사는 이웃이었다.

해빙의 상태를 깬 열차 안 남북 노동자들은 서로 궁금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어울려 지내다 이르쿠츠크역에서 헤어지게 된다. 이때 북한의 현장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미안합네다만...." 하면서 그동안 함께 찍은 모든 사진을 지워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마음이 짠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본래 마음이 이게 아닙니다'라는 게 느껴져서다.  

 지하철도 미술관같이 꾸며 놓은 모스크바.
지하철도 미술관같이 꾸며 놓은 모스크바. 후마니타스

한인들의 발자취가 서린 철길
"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켜보며 울분에 찬 조선인,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유랑하는 조선인, 만주에 침을 흘리며 새로운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일본인, 청나라 북쪽의 이권을 잃지 않으려는 러시아인, 모든 이민족을 불안한 눈으로 감시하는 청나라 관헌과 주민들이 한꺼번에 모이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열차 안이었다. 근대 문명의 대전환을 이룬 철도에 몸을 맡겼던 사람들은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인생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모두 불안한 현실에 하염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 '100년 전 열차의 승객들' 가운데
경기도 수원시엔 이곳이 고향인 화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신여성 가운데 한 분이라는 나혜석(1896-1948)을 기념한 거리가 조성돼 있다. 안내문을 읽다가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유럽여행길이 눈길을 끌었다. 1927년 서울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개성, 신의주를 지나 중국 만주와 옛 소련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갔단다. 그녀는 철도를 통해 근대를 경험한 최초의 조선 여성이 아닐까싶다.

<시베리아 시간여행>를 읽는 가장 큰 묘미 가운데 하나는 손기정, 안중근, 홍범도, 이광수, 조봉암, 여운형 같은 근현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다니며 남긴 행적을 소설 읽듯 생동감 있게 묘사한 내용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열차에 올랐던 청년 손기정, 레닌의 초청을 받고 민족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고려혁명군 대장 홍범도, 권총을 가슴에 품고 기차에 오르며 생의 마지막을 각오하는 안중근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수많은 한인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동포(고려인 혹은 카레이스키)들이다. 극동 내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 18만여 명의 한인들은 출입문이 하나밖에 없는, 가축을 실어 나르는 화물칸에 실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40일을 달려야했다. 80년 전 생사를 건 여정 끝에 도착한 허허벌판에 서서 망연자실했을 사람들이 떠올라 잠시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책에는 실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정보도 빠짐없이 수록되어있다. 저자가 권하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던 구간은 바이칼 호수 순환열차다. 바이칼 호수는 한민족의 시원이라고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다. 횡단철도 노선을 지나며 방문한 도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추천한 도시는 크라스노야르스크로 10루블짜리 지폐에 나오는 도시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큰 철도 박물관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도 미술관 같은 모스크바도 꼭 들를 곳이다. 책 말미 부록처럼 붙어있는 3박 4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 맛보기에서, 7일과 15일간 시베리아 깊이 들어가기 까지 여행 코스 안내서도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유익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박흥수 저 | 후마니타스 | 2017년 12월 25일
제 블로그에도 송고했습니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베를린까지 횡단 열차에 탄 사람들

박흥수 지음,
후마니타스, 2017


#시베리아횡단철도 #시베리아기차여행 #바이칼순환열차 #철도덕후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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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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