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도 미술관같이 꾸며 놓은 모스크바.
후마니타스
한인들의 발자취가 서린 철길"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켜보며 울분에 찬 조선인,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유랑하는 조선인, 만주에 침을 흘리며 새로운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일본인, 청나라 북쪽의 이권을 잃지 않으려는 러시아인, 모든 이민족을 불안한 눈으로 감시하는 청나라 관헌과 주민들이 한꺼번에 모이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열차 안이었다. 근대 문명의 대전환을 이룬 철도에 몸을 맡겼던 사람들은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인생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모두 불안한 현실에 하염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 '100년 전 열차의 승객들' 가운데
경기도 수원시엔 이곳이 고향인 화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신여성 가운데 한 분이라는 나혜석(1896-1948)을 기념한 거리가 조성돼 있다. 안내문을 읽다가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유럽여행길이 눈길을 끌었다. 1927년 서울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개성, 신의주를 지나 중국 만주와 옛 소련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갔단다. 그녀는 철도를 통해 근대를 경험한 최초의 조선 여성이 아닐까싶다.
<시베리아 시간여행>를 읽는 가장 큰 묘미 가운데 하나는 손기정, 안중근, 홍범도, 이광수, 조봉암, 여운형 같은 근현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다니며 남긴 행적을 소설 읽듯 생동감 있게 묘사한 내용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열차에 올랐던 청년 손기정, 레닌의 초청을 받고 민족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고려혁명군 대장 홍범도, 권총을 가슴에 품고 기차에 오르며 생의 마지막을 각오하는 안중근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수많은 한인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동포(고려인 혹은 카레이스키)들이다. 극동 내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 18만여 명의 한인들은 출입문이 하나밖에 없는, 가축을 실어 나르는 화물칸에 실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40일을 달려야했다. 80년 전 생사를 건 여정 끝에 도착한 허허벌판에 서서 망연자실했을 사람들이 떠올라 잠시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책에는 실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정보도 빠짐없이 수록되어있다. 저자가 권하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던 구간은 바이칼 호수 순환열차다. 바이칼 호수는 한민족의 시원이라고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다. 횡단철도 노선을 지나며 방문한 도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추천한 도시는 크라스노야르스크로 10루블짜리 지폐에 나오는 도시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큰 철도 박물관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도 미술관 같은 모스크바도 꼭 들를 곳이다. 책 말미 부록처럼 붙어있는 3박 4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 맛보기에서, 7일과 15일간 시베리아 깊이 들어가기 까지 여행 코스 안내서도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유익할 것 같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베를린까지 횡단 열차에 탄 사람들
박흥수 지음,
후마니타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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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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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열차 삼등석에서 북한 노동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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