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계굴 입구곡계굴 입구에 선 조병규 회장
박만순
투두둑... 한두 방울 내리던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이내 추륵추륵 쏟아졌다. "오매 뭔 놈의 봄비가 한여름 장마비처럼 쏟아진댜" 평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쏟아진 1951년 4월 이날의 봄비는 영춘면 상2리에 있는 곡계굴을 가득 채웠다. 굴 입구에는 '쿨럭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빗물이 굴 안으로 쉼 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몇 시간 후 빗물이 굴을 가득 채우자 거꾸로 굴 안에 있던 빗물이 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만 나오더니 이윽고 숟가락, 그릇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타다 남은 이불 쪼가리를 비롯한 가재도구가 나왔다. 사람이 과음으로 토해서 이물질이 나오듯이 굴이 온갖 물건과 쓰레기들을 토해냈다. 물건들은 곡계굴 앞의 또랑을 통해 마을 주변으로 쏟아졌다.
동네 개들이 신이 났다. 오랜만에 봄비가 오니까 자기들 세상을 만난 양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뛰어다니는 개의 입에 뭔가 커다란 물건이 물려 있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다. 그런데 한 마리의 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의 개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다니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여러 마리 개가 그렇게 다니자 마을 사람들은 개들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조봉원(당시 17세) 역시 개가 물고 다니는 것이 궁금해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조봉우는 '악'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개가 물고 다닌 것은 '당숙모'의 머리였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 상황은 비단 조봉우에게만 닥치지 않았다. 상2리 마을 사람 몇몇은 개가 물고 다니는 것이 자신들의 어머니 머리임을 확인하고 기절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합심해서 한나절 동안 개들을 쫓아다녀 개 입에서 사람 시신을 빼앗았다.
서울에서 온 여고생도 있어굴 입구에 있던 밭은 수 백 명의 주민과 피난민이 드나들어 반질반질했다. 조봉원은 허리를 숙여 굴로 들어갔다. 앞이 캄캄해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어둠이 눈에 익어 앞으로 향하니 시커먼 물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기차 안 의자에 길게 앉아 있는 듯 했다. 중간 중간 호롱불이 그림자를 형성하며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멍석과 보리 짚으로 엮은 자리 등이 깔려 있었다.
또한 피난 온 주민들이 가져 온 이불도 보였다. 이외에도 솥이며 냄비 등이 바닥 곳곳에 널려 있었다. 조봉규는 1951년 1월 19일 이 굴에 첫발을 디뎠지만 일찌감치 피난 온 이들은 벌써 열흘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계굴은 마치 천연요새 같았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원래 단양에서도 오지였고, 특히 상2리에 있는 곡계굴은 외지인들이 거의 모르는 곳이었다. 석회암굴인 이 곳의 입구는 협소하지만, 안은 매우 넓어 수 백 명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겨울 난리 때인 1951년 1월 중공군의 남하소식에 따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했다.
이 굴에는 영춘면 상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영월과 평창에서 온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다. 조봉원이 굴 안으로 갔을 때 초등학교 동창을 보았고, 서울에서 온 여고생도 보였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지슬>에 보면 비슷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제주 4.3사건 때 한국군이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주민 약 120명은 안덕면 동광리에 소재한 '큰넓궤(큰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에서 1948년 11월부터 50~60일간 숨어 있었다. 감자(지슬)를 먹고 연명하다 국군에 의해 전원 몰살한 비극의 현장이 '큰넓궤'였다. 곡계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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