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느껴지는 판결문, '납북어부'들은 지지 않았다

'군산 승룡호' 반공법 피해자들의 재심 투쟁기

등록 2018.03.03 13:41수정 2018.03.0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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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법 제434조는 재심의 청구가 이유 없다고 인정하여 재심을 기각하는 결정을 한 때에는 누구든지 동일한 이유로써 다시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형사법에 있어서 무죄추정의 원칙 및 실체적 진실발견이라는 이념을 고려하더라도, 형사사법의 안정을 위하여 재심청구를 제한하는 위 조항을 위헌이라고 볼 수 없다), 재심청구인들의 재심청구 기각 결정이 확정된 바 있으므로, 동일한 사유를 들어 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판결문 뒷 부분. 재심기각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판결문 뒷 부분. 재심기각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변상철

지난 2월 22일 군산에 거주하는 납북어부 피해자들 서창덕 등 5명은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형사2단독(판사 허윤) 재판부는 위와 같은 판결문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들은 동일한 이유로 재심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일한 재심사유로 재심을 청구했을까? 먼저 이 사건의 전개를 살펴본다.
(관련 기사 : 다방 주인에게 국밥 들고 속죄하러 가는 남자)


첫 번째 처벌

1967년 5월 28일 군산 선적 승룡호는 연평도 해역에서 조기를 잡고 있던 중, 급작스런 북한 경비정에 피납되어 124일간 억류되었다가 같은 해 9월 28일 인천을 거쳐 군산으로 귀환하였다.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군산경찰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1968년 9월 3일 경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두 번째 처벌

석방된 뒤 이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난 1969년 1월 27일 군산경찰서 수사관들은 주거지 등에서 이 피해자들을 다시 검거하였다. 이들을 다시 검거한 이유는 납북되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북한 사회를 찬양하며 돌아다녔다는 혐의였다.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것도 억울한 일인데, 하지도 않은 찬양고무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일까?

 재심준비를 위해 군산에서 모인 피해자 가족, 유족들
재심준비를 위해 군산에서 모인 피해자 가족, 유족들변상철

첫 번째 재심


이들은 그동안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자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2011년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여기에'로 연락했다. 자신들은 너무도 억울하게 조작된 사건이니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지금여기에'는 이들 피해자들의 수사기록을 찾아 기록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불법 수사가 진행된 것을 확인하였고, 지난 2013년 4월 30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 재심을 신청했다.(2013재고단1)

(참고로, 서창덕씨는 모두 세 번의 처벌을 받았다. 납북되었다가 귀환 직후에 1968년9월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 두 번째는 1969년 재차 검거되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4년 간첩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중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으나, 1969년 처벌 받은 사실은 재심을 별도로 신청하여 다른 어부들과 함께 법정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재심 신청의 이유로는 '군산경찰서 수사관들에 의하여 불법체포를 당하여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조사를 받았으니 이는 형법 제124조의 불법체포, 불법감금죄 및 형법 제125조의 폭행가혹행위죄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

이 취지에 맞춰 당시의 수사 기록과 피해자의 진술, 참고인 진술서 등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군산지원 재판부는 이러한 불법수사에 대한 증명이나 증거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우리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불법 감금과 고문을 통해 조작된 사건이 명백함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지금여기에' 활동가와 피해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불법수사를 입증할 다른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5일 대검찰청에서 두 번 이상 납북된 어부에게는 고의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하고, 수사기관은 구속을 원칙으로 하라는 문건이 작성되어 배포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단순히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에게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을 무리하게 적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우리는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신규 증거'를 발견했다고 판단 2016년 10월 7일 류제성 변호사(법무법인 진심)의 도움을 받아 또다시 재심을 신청하였다.

두 번째 재심

두 번째 재심 신청에 대해 4번의 공판이 열렸다. 이전 재심 재판부는 단 한 차례도 피해자를 불러 직접 피해 사실을 듣지 않았던 것에 반해, 이번 재심 재판부는 비교적 진지하게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재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전 재심 재판의 기각 결정이 너무나 부당한 오판이었다는 확신과 분노가 들었다.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이전 재심의 오판으로 훼손된 사법적 정의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결정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판장은 같은 이유로 재심을 신청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각 사유이라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두 번째 재심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모인 피해자들과 류제성 변호사
두 번째 재심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모인 피해자들과 류제성 변호사변상철

기각, 그러나 지지 않은 싸움

두 번째 재심을 담당한 재판장(판사 허윤)은 앞서 기술한 이유로 재심을 기각하였다. 그러나 위의 기각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았다.

"1969. 1. 27. 주거지 등에서 검거, 피고인들은 그 날로부터 매일같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였는데, 피고인들에 대한 구속영장은 1969. 2. 5.에 이르러서야 발부된 사실 등이 인정된다. 위 인정 사실들과 피고인들과 유사하게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의 최초 검거일시와 영장발부일이 다른 경우 수사기관의 불법체포 사실을 인정하여 재심이 개시된 다수의 사례가 있는 점을 더하여 보면, 피고인들은 검거일부터 매일같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실질적으로 영장 없이 불법체포된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피고인 서창덕은 낮에는 경찰서에서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았고, 밤에는 당시 수사관들의 감시 하에 여관에서 감금을 당한 것과 같은 상태로 잠을 잤다고 진술한다)."

 판결문
판결문변상철

불법수사, 고문 등의 행위를 인정함에도 결국 기각을 할 수 밖에 없는 판사의 고민이 느껴졌다. 우리의 이번 싸움은 재심을 통해 승소하기를 바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재심을 신청한다면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심을 신청했던 것,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시도했던 것은 우리의 억울함을 누군가 들어주고 그 피해에 대해 인정받는 그 자체로서 위안과 위로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국가가 그 역할을 해주면 더 없이 좋으련만 우리 사회는 시민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린 그런 사회임이 서글프다.

이번 형사재판을 통해 수사기관의 불법 수사가 확인되었다. 불법감금과 고문이 있었음을 판결문에 기재하고 있다. 국가의 불법수사 책임이 명백하므로 우리와 피해자들은 이 판결문을 근거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청구를 시작할 것이다.

비록 여러 번의 형사소송은 패소했지만 결코 패소한 싸움이 아닌 것을 증명해 낼 것이다.
#지금여기에 #승룡호 #납북어부 #간첩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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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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