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6. 김성년 당시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수성구당협 사무국장(현수막 든 오른쪽 사람)은 동료와 함께 대구시의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박차고 올라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사진=김성년 제공)
뉴스민
어수선한 틈을 타 김성년(당시 28세)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수성구당협 사무국장은 서둘러 의장석으로 향했다. 현수막을 손에 들었다. 동료 한 명과 의장석을 밟고 올라서 현수막을 펼쳤다. 까만 배경에 '근조, 대구시의회'라고 쓴 현수막이 활짝 펼쳐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이틀 전 새벽, 김성년 사무국장은 시의회 2층 본회의장 맞은편 작은 회의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새벽 5시를 지나 6시에 조금 못 다다랐을 때, 김 사무국장은 주변이 소란스러워 잠을 깼다. "안에서 무슨 소리 난다!", "한다, 한다!"
본회의장 입구를 지키던 동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회의장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좁은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옅은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회의장에는 20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거나 서성이고 있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회의장 앞을 지킨 게 무색했다. 하필 이럴 때 태수 형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들어갔지?
2005년 12월 24일 새벽 6시(대구시의회 회의록 기준), 본회의장 안은 다급했다. 강황(당시 60세) 대구시의회 의장은 국방색 두꺼운 외투를 입고 의회 건물 뒤편으로 접근했다. 건물 뒤편 외벽에는 철제사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사다리는 그대로 본회의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비상구와 맞닿았다. 강 의장과 시의원 21명은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의회 건물 밖에서 본회의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건물 안을 지키는 사람들은 몰랐다. 들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강황 의장은 서둘러 의장석에 올랐다.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준비된 원고를 읽어 회의 시작을 알려야 했다. 원고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회의장 안은 너무 어두웠다. 전등을 모두 켜지 못했다. 전등을 켰다간 건물 안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강 의장 옆에서 의회 직원 한 명이 손전등을 켜 원고를 비추었다. 그제야 원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148회 대구광역시의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당초 제148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 의사일정을 12월 26일 오후 2시에 개의토록 의결하였으나 대구광역시의회 회의규칙 제16조 규정에 의하여 의장이 긴급하다고 판단하여 오늘 본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제148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를 오늘로 하고 제3차 본회의를 12월 26일 2시로 의사일정을 변경하고자 하는데 의원 여러분 이의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강 의장은 손에 든 의사봉을 조심스레 세 차례 허공에서 내려쳤다.
의사일정 제1항 '대구광역시 구·군의회 의원 선거구와 선거구별 의원 정수에 관한 조례 전부 개정 조례안'을 상정했다. 이렇게 새벽이슬을 맞으며 생쥐처럼 회의장으로 숨어든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국회는 그해 8월 4일 공직선거법을 개정했다.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던 구·군의원 선거를 1개 선거구에서 2명~4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전환했다. 9월 30일 꾸려진 대구시선거구획정위원회는 세 차례 회의 끝에 구의원 4명을 뽑는 선거구를 11개나 만들었다. 11개나 되는 4인 선거구를 2명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임무가 강 의장에게 주어졌다.
장태수(당시 34세)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대변인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시의회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에 이런 식으로 날치기 해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명색이 시의원인데 비상구를 이용해 회의장으로 진입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중대선거구제로 공직선거법이 바뀌고 전국에서 4인 선거구를 늘리는 획정위 안이 마련됐다. 하지만 각 시·도의회에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거대 양당의 셈법에 따라 번번이 2인 선거구로 쪼개졌다.
장태수 대변인과 당직자들은 12월 20일부터 시의회 농성을 시작했다. 참여정부였다. 경찰이 함부로 사람을 끌어내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황 의장과 면담도 했다. 서두르지 말라고 요청했다. "법정 시한이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이번 회기에 급하게 처리하지 말자. 처리 미뤄두고 다른 정당, 시민단체랑 토론회를 해보고 합의안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어요" 의장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농성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23일 전국 곳곳에서 4인 선거구가 2인 선거구로 쪼개졌다. 경북도의회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이 반발해 본회의장에서 회의가 어려워지자 상임위원회 회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쪼갰다. 충북도의회도 일부 의원 반대와 시민단체 반발 속에 쪼개기 처리했다. 본회의를 26일로 예정한 대구시의회는 23일 저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예정대로 26일에 쪼개기 안을 처리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