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묘 전경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이렇게 밖에서도 잘 보인다.
이양훈
공주는 조선 세종과 소헌 왕후 심씨 사이에서 8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장남인 문종의(1414년 생) 동생이고 둘째 아들인 세조의(1417년 생) 누나라 알려져 있다. 그러니 대략 1415~6년 사이 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1428년에 안맹담에게 시집갔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여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1477년(성종 8) 별세하여 15년 전 먼저 죽은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양효'란 안맹담이 죽은 뒤에 내려진 시호이고 원래는 죽성군이다. 그러니 이곳은 세종의 둘째 딸과 사위의 무덤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쨌기에 총명하여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했을까?
공주의 시가인 <죽산안씨대동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풀어 보자.
유학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운 조선은 건국의 주체세력 역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학의 특성상 종주국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독자적인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최만리의 상소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옛부터 '왕보다 신하들의 힘이 너무 세다'고 했던 조선의 왕인지라 이들의 반대를 무작정 물리칠 수도 없는 일. 세종은 한글 만드는 일을 몰래몰래 조심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가 생겨도 대놓고 물어 보고 연구해 보라 할 수도 없어 곁에 있는 최측근이나 식구들과 상의할 수 밖에 없었을 터.
그 때 어려움을 풀어준 딸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의공주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 한글 창제의 숨은 공신이었던 것. (위 기록이 전하는 <죽산안씨대동보>가 1976년에 편찬 및 출판된 집안 족보이기에 100%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공주는 또 나라의 보물까지 만들었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공주는 먼저 죽은 남편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보물 제966호.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그 정의공주와 남편의 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