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증명이 필요하지 않는 신세계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기본소득제 도입

등록 2018.03.30 10:16수정 2018.03.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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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구휼이란, 위정자들에게 매우 민감한 중대사였다. 백성들의 배가 불러야, 안정적으로 세수와 병력을 확보하는 등 국가의 근간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194년 고구려의 진대법을 시작으로, 구휼의 역사가 길다. 특히 성리학이 발달한 꽃피운 조선은, 기근이 발생하면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기우제를 지내는 등, 왕이 직접 기근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러나 그런 조선조차도 보릿고개와 기근을 면키 어려웠으며, 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려 인구의 20%가 감소하는 등, 빈곤과의 전쟁은 인류 공통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가 근간이 된 현대의 복지는 문명의 발달을 이룬 오늘까지도, 빈곤과 맞서 변화하며 또 발전하고 있다.

무르익는 기본소득제 논의

지난 3월 17일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기본소득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해당 연구는 기존 복지예산의 일부를 기본소득제로 대체할 때, 2015년 기준 1인당 월 11만7천 원(연간 140만 원)의 기본소득을 증세 없이 지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경우, 1분위의 가처분소득은 감소하는 반면, 차상위·중위계층은 증가했다. 이는 현재 복지제도가 대부분 최하층인 1분위 가구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분위 가구는 세금을 20~30% 증세해야 비로소 가처분소득이 현행 제도보다 증가했다. 즉, 이번 연구는 기본소득제가 빈곤층을 위한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기존의 복지가 아우르지 못하는 계층을 포괄할 수 있는 정책임이 증명됐다.

'기본소득제'란, 원칙적으로 자산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근로여부와도 관계없이 개인 모두에게 지급하는 소득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선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기존의 복지와는 다르게, 보편성(모든 국민에게)·무조건성(자격조건 없이)·충분성(개인의 자유 실현)의 원칙을 요건으로 한다. 즉,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보장함과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의미의 복지인 셈이다. 이는 마틴 루터 킹, 밀턴 프리드먼으로부터 비롯되어, 최근 저커버그와 머스크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기본소득제는 아직 논의 단계이며,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국가는 없다. 아직 실험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알래스카, 브라질, 인도, 나미비아, 뉴질랜드 등 전 세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지만, 기본소득제의 3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연구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알파고를 비롯한 AI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임에 따라,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에 따라, 기본소득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으며, 특히 북유럽은 스위스가 기본소득제 실시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등 논의가 가장 활발하다. 우리나라 역시 서울시의 청년배당, 성남시의 청년수당으로 익숙해져 있으며, 지난 19대 대선에서도 4차 산업혁명과 기본소득제가 화두가 된 바 있다.

심화되는 '헬조선'과 복지의 실패

'헬조선' 담론이 대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G20에 속하는데 이르는 등,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한국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좌절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기본적인 삶의 질을 포기한 'N포세대'까지 등장하였다. 즉, 현재의 '헬조선'이라는 담론은 국가의 경제 발전과는 상반되게, 개인의 계층이동이 점차 어려워지는 데에서 기인한다. '3포세대'가 'N포세대'로 발전하는 동안, 복지는 확대되고 새로운 정권이 수립됐지만, 아직까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부동산 대책과 최저임금 인상, 대출 규제 등의 정책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언제쯤 나아질지, 양극화는 언제 해소될지, 우리네 고달픔은 끊이지 않고 있다.


3포세대가 등장한 2011년 정부예산은 총 309조1000억 원이었고, 그중 보건·복지·노동예산은 86조4천억 원이었다. 그리고 2018년 정부예산은 총 428조8천억 원까지 확대되었으며, 보건·복지·노동예산 또한 144조7천억 원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상·하위 10% 소득 격차는 매년 상승하여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6년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의 임금 또한 정규직·대기업의 5~60%대에 머무르는 등, 2017년 소득 불평등은 OECD 2위에 달했다. 또한 소득은 줄어드는 반면, 부채는 증가세를 보이는 것도 문제이다. GDP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신흥국 중 1위를 차지한 반면, 가구당 소득 증가율은 0.6%였다.

복지예산이 2배 가까이 증가하는 와중에도, 양극화 등의 지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존 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재분배 개선율'이라는 지표가 있다. 정부의 소득재분배가 지니계수 개선에 미친 영향을 판단하는 척도인데, 한국은 2013년 기준 11.3으로 최하위권을 차지했다. OECD 평균이 49.8이고, 핀란드, 아일랜드, 벨기에 등 상위권 국가가 80대인 것을 고려한다면, 처참할 정도의 수치이다. 이 말인즉슨, 현행 복지체제를 무분별하게 확대하기 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복지가 도입되어야 할 시기가 왔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고용불안

현재 우리나라의 고용불안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가 고용 없는 성장에 들어섰고, 신흥국들의 발전으로 인해 산업 경쟁력이 뒤처지는 것이 원인이다. 한국은 1990년부터 2015년까지 GDP 누적성장률이 249%인데 비해, 일자리는 단 49.4%가 증가한데다가, 우리나라는 제조업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할수록 일자리는 줄어드는 구조이다(제조업의 취업계수는 10.8, 서비스업은 22.9). 게다가 임금 격차 문제가 심각한 탓에, 중소기업은 구인난이라는 모순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실업 문제는 OECD에서도 심각한 편이며, 가파른 저출산 고령화 속도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2036년에는 0%에 돌입할 예정이다. 현 정부에서도 일자리 문제 해결에 애를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앞으로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이 촉진시킬 자동화로 인한 고용불안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향후 5년 동안 15개국에서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10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보고했으며, 2013년의 논문에서는 미국 고용의 47%가 향후 10년 이내에 자동화된다고 밝혔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2017년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25년에 자동화로 인해 고용의 위협을 받는 이는 전체 취업자 중 70%에 달한다.

전술한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금도 심각한 고용불안이 미래에는 더 악화될 것이며, 실업 및 고용불안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생계 불안은 저소득층 등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공통적인 문제로 확대될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실패해왔던 선별적 복지를 유지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비효율적인 체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복지가 필요해진다면, 굳이 행정력을 낭비하여 선별적 복지를 하는 것보다는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별적 복지의 사각지대 문제

선별적 복지가 미래에 부적합한 형태의 복지라는 이유로서,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복지가 필요해진다면, 복지 대상자를 선별하는 과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복지의 사각지대'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복지의 사각지대란, 복지가 절실한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격조건의 제한이나 절차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양의무자가 존재하거나, 소득은 부족하지만 처리하기 곤란한 재산이 소득으로 인정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과거 '송파 세 모녀 사건' 역시 월세 보증금을 이유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다 생활고로 인해 자살을 택한 비극이었다.

물론 사건 이후 정부는 이를 보완하려 했지만, 그 노력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사업을 통해 발굴한 20만 명의 사각지대 인원 중, 실제 지원을 받은 이는 20%에 불과했다. 긴급복지사업 예산의 집행율 역시 2010년 87.2%에서 2013년 55.2%로 나날이 감소 중에 있다. 두루누리 사회보험사업 또한 5천억 원을 투입하여, 고작 15명을 새로 사회보험에 가입시키는 데에 그칠 정도로, 선별적 복지를 강화하고자 하여도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선별적 복지에는 사각지대를 해소하려면 부정수급이 증가하고, 부정수급을 방지하려면 사각지대가 커지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현재, 사각지대는 적게는 20만 명,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고, 부정수급의 경우, 2012년 7392건에서 2015년에는 1만5478건으로 증가 추세이며, 미환수율 역시 57.82%에서, 73.18%로 증가 추세이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부양의무자 등의 조건을 완화한다면, 부정수급의 문제가 커질 것이다.

미래상에 부적절한 선별적 복지

미래에는 고용불안 등의 사회문제가 전 계층으로 확산되는 것은 물론,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노인 부양 문제가 심각해지는 등 갈수록 복지 수요와 지출은 증대될 전망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정비용 및 절차는 점점 비대화되고 복잡해질 것이 예상된다. 그렇게 될 경우, 복지의 사각지대 문제 역시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사각지대 발굴 인원 중 수혜대상이 20%대에 불과한 것은, 공무원의 인력 부족 등 선별적 복지체제를 운영할 여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 한국의 사회복지 공무원은 OECD 평균의 1/30 수준으로 매우 부족한 편이다. 사회복지 대상자 수가 2007년에서 2012년까지 300% 가까이 폭증한 것에 비해, 공무원은 고작 2.3배 증가하였고, 이는 앞으로 고령화가 심화될수록 더 악화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복지 공무원을 OECD 평균까지 확충한다면, 추가로 소요되는 인건비는 연 50조원 정도이며, 2009년 기준 복지제도의 행정비용은 전체의 4%로 추산되므로, 선별적 복지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미래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우려가 높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비대해지고 복잡해지는 복지제도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 실제로 2007년 독일 베르너의 논문에 따르면, 기본소득으로 기존 복지체제를 대체할 경우, 심사 과정에 소요되는 인건비 등 125조 원을 절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위와 같은 이유로, 미래에는 기본소득제의 중요성과 실효성이 더 두드러질 것이다.

재원 조달의 어려움과 조세저항을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문제는 기본소득제가 아니더라도, 복지제도 자체가 공통적으로 직면하게 될 운명이다. 보도에 따르면, 기초연금 역시 2040년에는 100조 원이 소요되고, 노인 인구 비중이 40%를 돌파하는 2060년에는 228조 원까지 불어날 예정이다. 월 30만 기본소득의 180조 원보다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조세저항 역시 오히려 기본소득이 더 자유롭다. 초고령 사회에서의 노인들은 재원 조달에 기여하는 바는 적으나, 복지의 대부분을 누리게 되므로, 그들을 부양하는 미래세대의 조세저항이 극심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제는 미래세대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기본소득제의 효과와 대안

2010년 한국사회복지연구회의 연구에 따르면, 현행 체제보다 기본소득 모델에서 상대빈곤 감소효과와 지니계수 감소효과가 20~30%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이건민의 논문에서도, 현행 체제보다 기본소득 실행시의 빈곤율과 불평등 감소폭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10년 가핑켈의 논문에 의하면, 미국에 기본소득을 적용했을 때에도 기존 제도보다 기본소득의 불평등 완화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외에도 알래스카, 브라질, 인도 등의 외국의 기본소득 실험에서도 기본소득의 효과가 두루 검증된 바 있다.

나아가, 행정의 간소화라는 기본소득의 절차와 선별적 복지의 효율성이라는 장점을 모두 취한 획기적인 방식의 복지인, '안심소득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2017년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주장한 안심소득제란, 연소득 5천만 원 이상의 가구에는 소득세를 징수하고, 기준소득 이하의 가구에는 기준소득에서 실제소득을 뺀 나머지 금액의 40%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 기준에 해당하는 대상은 전체 가구의 47.3%이며, 이들에게 지급되는 재원은 총 약 25조원에 불과하다. 안심소득제의 효과 또한 탁월했다. 먼저, 행정절차가 단순화되고,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니계수 완화 효과가 현행 제도와 기본소득제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진정한 복지에 대하여

지난 2016년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몇몇 대학교에서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가계장학금의 비중을 늘린다는 계획을 밝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정착이 잘 되고 있지만, 가계장학금이 논란이 된 이유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가난 증명'을 하는 것은 낙인 효과와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고 자괴감을 느끼지만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치부를 밝혀야 하고, 밝혔다 할지라도 가난 증명에 실패한다면 성적장학금을 받지 못할 수 있다. 국가장학금 또한 매년 소득분위 산정으로 잡음이 나온다.

이것이 선별적 복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선별적 복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지고, 불행의 또 다른 씨앗을 낳음으로써 복지를 퇴색시키고 있다. 가난을 증명해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괴감이나 박탈감이라는 낙인 효과가 필연적이다. 가난함에도 가난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문제 또한 상존하며, 행정 문제로 인해 부정수급자라는 이름의 범죄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가난을 증명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해, 결국 자살을 택한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복지의 사전적 정의는 '행복한 삶'이다. 그리고 복지제도 및 사회안전망의 역할, 또 국가의 역할은 모든 시민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삶과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복지의 의의는 평등한 출발선을 만드는 데 있다. 이처럼 복지는 개인에게 금전적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며, 또 은혜를 베푸는 시혜적인 성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복지란 국가가 은혜를 베풀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줄 것을 주는 것이고, 시민에게는 감사히 받는 것이 아니라 소득 여부를 떠나 받을 것을 받는, 양자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에 따른 제도인 셈이다.
#기본소득제 #4차 산업혁명 #복지 사각지대 #선별적 복지 #안심소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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