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꼬리를..." 철없고 잔인한 반응에 기가 막혔다

[기고]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소 실장

등록 2018.04.08 12:41수정 2018.04.0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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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마이뉴스에 나의 의료계 성추행 기고문(관련 기사 : 의료계 성폭력,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이 실리자 독자들의 관심은 24년 전 나를 성추행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집중됐다. 실제 기고문에 달린 댓글에도 실명을 밝히라는 요구가 많았고 수많은 기자들도 전화를 걸어 이름을 대라고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기고문에서 밝힌 사례는 목격자가 많았던 사건이라 인용했을 뿐, 그 사건은 내가 경험했던 수많은 성희롱과 성추행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용된 의료인도 성적 '갑질'이 사회 문화처럼 만연하던 시절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해자 중 한 명이다. 굳이 이름을 대라면 '닥터 X'가 좋을 것 같다.

성폭력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고 처벌을 원하는 건 피해자의 선택이다.

나의 경우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데다 수많은 사건 중 하나기 때문에 애초에 특정인의 잘못을 폭로할 목적으로 글을 썼던 건 아니었다.

사실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지난 16년간 기자로 활동했던 개인적 경력으로 인해 의료계 성추행 현황을 써달라는 청탁을 많이 받았다. 직장 생활을 33년간 했으니 얼마나 많은 성희롱, 성추행 사건을 보고 경험했겠는가. 너무 많아서 쓰기가 힘들다는 게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나와 다른 환경에서 일했던 주변의 동료 여의사들에게 물어봤는데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한 젊은 후배는  "어휴, 나 성추행 한 인간들 트럭에 태우면 한 트럭으로는 모자라죠"라고 말했고 5년 후배 역시 "그건 일상이라 일일이 기억도 안 나요"라고 밝혔다. 사실이 그랬다. 후진적인 폭력적 직장 내 성적 갑질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너무 흔했다. 피해자들은 괴로웠지만 애써 덮고 지우면서 지냈을 뿐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무섭고, 분했을까...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실은 결정적 계기는 미투 운동에 동참한 이들을 향해 심한 비난을 쏟아내는 현장을 목격한 때문이다. 그 중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남편으로 둔 이들도 있었다.

"여자가 꼬리를 친 거 아냐?"
"본처가 가만히 있는데 왜 첩들이 난리야?"
"위력에 의한 간음이라는 게 말이 돼?"....


난 그들의 철없고 잔인한 반응에 기가 막혔다. 피해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기자회견을 하며 피눈물을 흘릴 때 나는 그들이 너무 안쓰러워 같이 울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무섭고, 분했을까... 그런 피해자를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비난을 하다니! 그래서, 2차 피해를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해서 기고문을 썼던 것이다.

권력을 가진 검사도, 전문직인 의사도 성추행을 당했으니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여성은 오죽 심각한 피해를 봤겠느냐, 그러니 그들을 향해 무책임하고 잔인한 비난만은 삼가 달라는  바람을 담아 글을 썼다. 실제 내가 보냈던 기고문의 원래 제목도 '성적 갑질 없는 인권 선진국을 기대하며'였다.

기고문을 쓰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의 희망은 우리 사회에 강자의 '성적 갑질'이 발붙일 수 없는 인권 문화가 정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경제적·사회적 약자에게  심각한 성폭력 피해를 줬던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정의로운 신이 존재한다면, 부디 가해자들에게는 진심어린 용서를 구할 용기를 주시고, 피해자들에게는 위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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