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도 머리가 나쁜가봐" 수능국어 풀다 생긴 일

고3 딸아이에게 도발했다가... 역지사지의 어려움

등록 2018.04.10 09:45수정 2018.04.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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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첫 학력평가(학평)를 치른 고3 둘째 딸 아이가 4월 학평을 앞두고 역시 민감합니다. 3월에 학평을 치르고 그날 밤, "아빠 나도, 머리가 나쁜가 봐"라면서 은근히 우리 부부를 바라보던 도전적인 눈초리가 다시 살아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짧은 밤의 긴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지난 3월 8일입니다. 아이가 정해진 시간 안에 국어 문제를 다 풀지 못했다며 눈이 퉁퉁 불어서 울더군요. 이 때 위로해 주지 못하고 "너는 평소에..."라는 약점을 건드린 것입니다. 사실 평소에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어른에게도 늘 적용되는 그런 약점인데 말입니다.

아이가 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때 제 심정은 '우리말인 국어조차 시간 내 못 풀었나, 그러니 영어와 수학은?' 이런 신경질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문제 가져와 봐"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여기에는 늘 직장과 동료에게서 쫓아다니는 아이의 대학 이야기 그리고 내 젊은 시절에 대한 망각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제 방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이거요" 하더군요. 사실 성적만 아니라면 충돌할 이유가 없는 딸아이입니다. 아마 제 딸과 농사를 지었다면 우리 집안은 대농이 되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사고를 친 학평 문제지를 보았습니다.

 [렌즈의 원리]
[렌즈의 원리] 조진태

눈송이가 아니라 빗줄기가 내리더군요. 저는 무엇이 문제냐고, 시험지를 쭉쭉 넘기면서 말했습니다. 틀린 지문은 모두 카메라에 대한 지문이었습니다. 평소 카메라를 좋아하는 저는 이건 상식이 아니냐, 너는 맨날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전송하면서 원리도 모르냐고 또 도발을 했습니다.


지문이 심상치 않아 시간이 부족해 마지막으로 넘겼는데 다 찍었다고 하더군요. 로또를 찍어도 하나는 맞추는데. 이른바 열받은 아빠의 기호지세. "평소에 노력이 없으면 행운도 없다." 그럴 듯한 말을 했는데 물론 실수였습니다. 부모가 늘 아이에게 하는 실수지요.

아이가 착착 문제지를 접더니 "아빠 잠시만" 하더군요. 그리고 제 방에 가더니 새 문제지를 뽑아왔습니다. 풀어 보라는 의미이지요. 좋다고 했지요. 제가 소위 말하는 점팔렌즈의 달인인데. 이 렌즈로 저를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찍었는데.


그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 렌즈에 이런 비밀이 있구나. 이래서 배경과 인물이 분리되는 것이구나. 조리개를 조이는 이유가 이론적으로 이렇구만, 심도가 수치와 이런 관계가 있구만'

이런 어설픈 생각을 하는 사이에 30여 분이 흐르고 아이의 질책이 이어졌습니다.

"아빠 이 지문 10분 넘기면, 문법이나 화법 찍어야 돼."

저 혼자 20여 분이 넘게 그리고, 밑줄 긋고, 메모하는 순간 아내가 끼어 들었습니다. 자기도 학창시절에 제법 공부 좀 했다는 그 자신감, 그것이 저를 살렸지요.

"아빠가 맨날 술만 먹어서, 이제 치매기가 있구나."

제 딸은 엄마에게만 호감이 있지는 않았나 봅니다. 사실 딸아이를 현장에서 매일매일 괴롭힌 당사자인 만큼 아이의 복수심도 그 만큼 만만치 않았겠지요. 아주 순식간에 다시 문제를 뽑아 엄마에게 내밀더군요.

부부 국어 학력 평가 경연장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오십보 백보. 제가 오십보입니다. 아내는 학창시절에는 공부 좀 했다더니... 맨날 사진에 찍히기만 했으니 조리개와 셔터의 개념이 없지요.

여하튼 이것이 아이의 눈초리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 우리의 기억입니다. 사실 부모는 아이의 눈치를 보지요. 그런데 그 눈치가 나를 중심으로, 내가 돈을 못 벌어서, 내가 잘 못해서, 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너는 왜 힘든지" 말은 정말 좋지만 역지사지의 어려움입니다. 아이의 입장에 들어가기 보다는 아이를 위한다며 카메라를 늘 찍어대던, 아빠의 카메라를 반성하게 만든 힘겨운 지문이었습니다.
[조리개와 샷터 스피드] 빛을 담을 원리
[조리개와 샷터 스피드]빛을 담을 원리조진태

#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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