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끔찍한 학살 사건 알린 '원조 석호필'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⑥]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과 제암교회

등록 2018.04.14 14:57수정 2018.04.26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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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제암교회  현재도 여전히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제암리 제암교회 현재도 여전히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층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홍윤호

[기사 수정 : 16일 오후 5시 11분]

99년 전 그 날 제암리에서는  


1919년 4월 15일. 3.1 운동이 한 달 반 남짓 동안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을 때, 경기도 화성의 작은 마을 제암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인근 발안 장터에서 3.1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지 일주일 이상 지난 시점, 4월 15일 오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 주민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었다. 발안 장날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매질이 있었으니 사과하겠다고 속여, 마을의 15세 이상 남성들을 모두 모이도록 한 것이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갑자기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무차별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교회 안에서 터져 나온 비명 소리에도 아랑곳 없었다. 그리고 증거 인멸을 위해 통째로 불을 질렀다. 빠져 나오거나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사람들에게는 총격을 가해 살상하였다.

교회당 안팎에서 29명이 살해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민가에 불을 질렀고, 민가 31호가 불타버렸다. 희생자 중에는 총소리에 놀라 집에서 뛰쳐나와 교회로 가다가 자기 집 불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가며 일본군 총에 맞아 숨진 중년 부인도 있었다.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스코필드(Schofield, F.W.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가 현장에 찾아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으로 찍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내외에 알리지 않았다면 묻혔을 학살 사건이었다. 이른바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제암교회 내부  제암리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리 크지 않은 시골 교회이다. 대도시에 숱하게 있는 대형 교회보다 정감이 간다.
제암교회 내부 제암리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리 크지 않은 시골 교회이다. 대도시에 숱하게 있는 대형 교회보다 정감이 간다. 홍윤호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시작된 3 .1 운동이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일본에 대한 격렬한 저항과 시위가 본격화된 시점에서 발생하였다.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도 3월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3월 31일 발안주재소가 습격당하는 등 사건이 확대되었고, 4월 5일에는 발안 장터에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청년들이 경찰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이에 청년들이 밤마다 제암리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려 지역 주민들을 독려하였고,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결국 일본군 검거반이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 고문, 통제하는 과정에서 비극이 발생하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측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조사에 의해 사건 전개 과정이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전개되었음이 알려졌다.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이다.

현장 지휘 책임자인 아리타 중위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여론의 지탄이 이어지자 7월 17일에 가서야 군법회의에 붙여졌지만, 역시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처벌은 없었다.

선교사에 의해 알려진 사건이 이 정도였으니,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한 가지 이 사건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사건의 배경이 된 발안 장날의 시위가 지역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의 제휴에 의해 종교의 차이를 떠나 거족적 차원에서 결성한 '구국동지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독립'의 기원 아래 모두가 뭉친 사례인 것이다.

또 하나, 이 사건을 알린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는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로, 일제에 의해 반강제로 추방된 후에도 전 세계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1958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서거할 때까지 후학을 키우는 한편, 고아와 어려운 학생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다. 

현재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유일한 외국인으로 안장되어 있다. 

(한때 한국인들도 많이 본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2006~2009 방영)>의 주인공 스코필드가 석호필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스코필드 선교사의 한국 이름에서 유래한다)

3.1운동 순국기념관 전시관 내부  전시관은 4월 7일 현재 공사중이다. 4월 15일에 재개관한다.
3.1운동 순국기념관 전시관 내부 전시관은 4월 7일 현재 공사중이다. 4월 15일에 재개관한다. 홍윤호

제암교회 지금 그곳은

지난 7일 1982년 사적 제 299호로 지정된 곳. 제암리 사건 현장과 제암리 제암교회에 찾아갔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답사이다. 동네 규모도 커지고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 있는 발안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본래 제암리 사건이 있었던 장소는 현재의 제암교회는 아니다. 제암교회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있는데, 그 일대가 사건이 일어난 제암리 교회 터이다. 이곳에 잠깐 들러 만행이 일어난 그날을 회상하며 희생당한 분들에게 묵념을 드리면 좋겠다.

그리고 길을 따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암교회가 나온다.

현재 교회는 여전히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요일이면 지역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현재 진행형의 공간이다.

교회 예배당 아래층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어 전시관과 시청각교육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에 방문한 4월 7일 현재는 임시 휴관 중이었다. 4월 14일까지 새로 단장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15일 재개관한다.

3.1 운동 순국 기념탑  제암리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한 기념탑으로, 3.1운동 순국기념관 바로 앞에 서 있다.
3.1 운동 순국 기념탑 제암리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한 기념탑으로, 3.1운동 순국기념관 바로 앞에 서 있다. 홍윤호

2016년 4월에 답사했던 내용을 참고로 싣는다.

전시관은 제 1전시관과 제 2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제 1전시관에는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전시물과 일제의 만행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과거 자료들 중에는 1965년 일본의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일본 대학생 사죄 여행단을 이끌고 방문하여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고 현장 체험 학습을 하는 과정,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하여 그 돈으로 제암리 교회를 다시 세운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들도 있었다.

제 2전시관의 경우 제암리 사건을 포함한 3 .1 운동 당시의 전반적인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야외에는 희생 당한 23인의 순국 묘지를 조성해 놓았다. 본래 희생자들의 유해는 참사 현장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사건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1982년에 찾아내 유해를 발굴, 수습하여 합장 묘소를 만든 곳이다.

순국 23인 공동 묘소 제암교회 안에서 희생당한 23인의 공동 무덤이다. 1982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를 발굴해 합동 장례를 치르고 공동 묘소를 만들었다.
순국 23인 공동 묘소제암교회 안에서 희생당한 23인의 공동 무덤이다. 1982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를 발굴해 합동 장례를 치르고 공동 묘소를 만들었다. 홍윤호

묘지 아래쪽에는 1995년에 세워진, 둥그스름한 원추형 기둥 모양의 23인 상징 조각물이  있다. 서로 높이가 다른 23개의 기둥은 다양한 상징을 담고 있는 듯하다. 길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기념비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3.1 독립 만세 운동으로 무참히 학살된 순국 선열 23명의 넋을 기리고, 자주 독립 의지를 계승하기 위하여 이곳에 추모의 뜻을 세우다."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은 순국 선열들의 혼을 담은 추모비이며, 높이 솟은 기둥은 무한한 반전과 자유를, 기둥의 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미래 세계를 상징한다.

제암교회에 가면 전시관 뿐 아니라 순국 묘지와 상징 조각물에도 들러 이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 묵념을 드리자.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는 3 .1 운동을 공식적으로 '조선 만세 소요사건'이라 불렀다. '소요'란 다수 사람이 폭행과 파괴 행위로 사회 질서를 깨뜨리거나 교란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모든 사건에 대한 용어에는 그 사건에 대한 판단 주체의 '평가'가 반영된다. 당시 일제가 3.1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용어이다.

일부의 일본인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현장에 답사를 온다 한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한·일 관계가 개선될 수는 없다. 책임 있는 가해자 쪽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며 손을 내밀어야 피해자 쪽도 응어리를 풀며 손을 잡을 수 있다. 항상 문제는 '진정성'이다.

역사적인 반일 감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쉽게 해소되기는 어렵다. 거족적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벌인 학살의 증거로 남은 제암리 제암교회는 용서는 하더라도 잊을 수는 없는, 그리고 다시 고통이 되풀이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될 흔적으로 남아야 한다.

순국 23인 상징 추모비  23개의 원기둥으로 추모의 뜻을 나타냈다. 1995년에 세워졌다.
순국 23인 상징 추모비 23개의 원기둥으로 추모의 뜻을 나타냈다. 1995년에 세워졌다. 홍윤호

답사 정보

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문의는 031-369-1663,  http://jeam.or.kr/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기념관 관람은 오전 9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주차는 30~40대 가능

*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발안IC에서 나오자마자 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200m 직진한 다음, 다시 삼거리에서 좌회전, 작은 도로를 따라 500m 진입하면 제암리 교회에 닿는다. 내비게이션에서는 '제암교회'를 치면 안내해 준다.

*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1호선, 분당선 수원역 10번 출구에서 조암행 9801, 9802번 버스(경진여객)를 이용, 발안을 지나 제암리 입구 하차 후 걸어서 5~10분 들어간다.
화성 일대에 산다면 조암과 발안을 오가는 7-1번, 21번, 33-1번 시내버스를 이용, 제암리 입구에서 내려 걸어가도 된다. 
#제암리 학살 사건 #제암교회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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