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부제는 '시장 상품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이다. 쓸모 있는 실업이라니? 실업은 곧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실업이 가능한가? 그러나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풍요가 가득한 오늘날에 대해 오히려 "현대화된 가난"이라 지칭한다.
과거에 비해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시장 상품과 전문가에 대한 의존성"을 꼽는다. 이 책은 1978년에 출간된 책이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자의 통찰이 유효한 까닭은 사회는 더욱 세분화되고 발전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품 의존성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산업사회에서는 삶이 상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사는 시장 의존 사회에서는 생산된 상품의 양과 종류로 물질의 진보를 측정한다. 사회의 진보도 물질의 진보를 재는 잣대를 가져다가 측정한다. 즉 상품에 대한 기회가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되는지가 사회 진보에 대한 척도이다. 경제학은 대량 상품 생산자들이 사회의 지배권을 갖도록 옹호하는 선동으로 발전 되었다. 사회주의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분배구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변질했다. 복지경제학은 공공의 이로움과 물질의 풍요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이 말하는 풍요는 미국과 유럽의 학교와 보건소, 감옥과 구호소를 떠도는 가난한 사람에게 굴욕감을 주는 풍요이다.(26~27쪽)
일리치에 따르면 과거의 상인들은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해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현대의 상품은 소비자의 취향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대량생산을 통해 획일적인 개성을 강요한다. '유행'을 타고 상품은 전파되지만, 유행은 그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소비할 뿐이다. 또 유행이 지나면 그 상품들은 금세 폐기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지칭한 것처럼 이 상품들은 새로운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시장에는 늘 편의를 고려한 상품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오므로, 우리는 그 상품 소비가 합리적이라 여긴다. 때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멍청한 일이 된다. 그러나 일리치는 오히려 이로 인해 개성의 상실, 문화의 획일화, 창의력과 자율의 상실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선택할 자유조차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한 인문학 강의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장인이 만든 수저와 대량생산된 수저가 있다면, 우리는 합리적 소비라는 이유로 대량생산된 수저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때 물질적 합리성만이 으뜸이 되고, 장인이 만든 물건의 가치는 오히려 대량생산된 상품보다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등한시되고 물질적 합리성에 의한 소비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현대화된 가난'의 한 형태가 아닐까?
'현대화된 가난'이 주요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알아차릴 수 없으며 그 본성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일상 대화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발전이나 현대화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면 그때까지만 해도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어도 생존할 수 있었던 이들은 구매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 물건을 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체계적으로 강요를 당한다. 이제부터 그들은 시장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가져다 살 수밖에 없게 된다.(35쪽)
대부분의 사회학에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구조 또는 이데올로기에서 찾는 경우가 많지만, 이반 일리치는 시장 상품과 전문가에 대한 의존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렇다면 전문가는 어째서 나쁜가?
전문가 역시 시장 상품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접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간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성은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게 되어 우리 삶은 수동적으로 변하고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국가가 나서 전문가를 법으로 규제하게 되면서 전문 자격증 없이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전문가는 더욱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전문가에 의존하는 사회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더욱 제도적으로 옭아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치 상품처럼 국민이 '주택'을 가질 권리를 법으로 선포한 날, 그동안 국민의 4분의 3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온 집이 하루아침에 마구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가 건축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생겨난 것이다. 자격증 있는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 자기 손으로 집을 짓겠다는 사람은 유별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게 되었다.(33~34쪽)
전문가에 대한 의존성은 우리 삶의 주체성을 앗아간다. 그것은 정치 영역, 자유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에 따르면, 전문가의 언어가 일상에 침투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언어 생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또 가난은 경험하는 것에서 측정하는 것으로 변했다. 가난한 사람은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또 전문가 집단은 소비자를 휘어잡고, 그들이 만든 상품을 공급하고, 그 상품을 통해 고용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씩 지워버린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결국 시장 상품과 전문가의 의존성은 노동 역시 오직 시장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가치 없는 노동으로 우리를 몰아간다는 것이다. 과거의 노동은 필요한 것을 생산하거나 만들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냈지만, 현대의 노동은 직장을 벗어나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노동의 가치 역시 오직 상품 소비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리치는 전문가 집단이 제시한 지식이나 사실을 활용하는 것과 전문가들이 집단으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리치가 지적하는 것은 전문가 집단만이 모든 사회규범을 마음대로 정하고,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그에 따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서두에 언급한 '쓸모 있는 실업'은, 오직 상품 소비의 도구로 전락하는 노동에 대한 반항이다. 자율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실업 말이다. 상품 의존과 전문가 의존은 우리 삶을 획일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며, 모든 사회규범을 전문가들이 판단하고 만들도록 방관함으로 우리 삶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 역시 오직 상품을 소비하고 돈으로 환원되는 소비사회로 연결될 뿐이다. 우리가 얻는 것은 일리치의 말대로 일을 통한 만족이 아니라 생산을 지휘하는 사회관계에서 얻은 직장과 배경, 직책과 승진 등의 지위만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스스로 행동하고 판단하고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열고 상품 의존 시대의 종말시키는 것 말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시장 상품에 길들여진 우리가 쉽게 이 사회의 흐름을 거부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와 같이 우리는 노동을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자유란 다시 일하기 위해 누리는 휴식의 시간일 뿐이며, 여가마저 서비스 산업을 소비하고 각종 문화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의 가치는 퇴색되고, 마치 대량생산을 위한 로봇처럼 인간의 삶 역시 지나치게 획일화되고 틀에 박힌 삶을 지속할 뿐이다.
모든 사회문제는 고착된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다. 이데올로기의 파괴는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 인식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기존 사회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와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보다 합리적이며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가지의 광고와 소비를 강요당하고, 틀에 박힌 듯 직장 속에서만 아등바등하는 삶 속에서 주체적인 자아와 나는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야말로 일리치가 주장하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첫걸음 아닌가 싶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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