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연
새벽 5시 반, 네 또래의 회사 여직원과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살림하랴, 직장생활 하랴, 아이 키우랴, 많은 어려움이 있을 텐데 항상 웃는 얼굴이다. 간혹 걱정스러운 얼굴이 비쳐 무슨 일이냐 물으면 짐작대로 아이가 아프다는구나.
너의 엄마도 일을 다니지만, 아버지가 항상 엄마에게 미안해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남자인 아버지가 살림을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한계도 있을뿐더러 엄마 성에 차기는커녕 일을 만들어놓기도 하더구나. 그럴 때면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
"당신은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엎드려 책이나 읽으셔."
그러나 아버지가 어디 미안한 마음이 엄마뿐이랴. 아버지는 아직 너를 키우면서 뭘 사달라고 보채는 걸 단 한 번도 못 봤다.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여고 시절에도 너희들은 다른 집 아이들처럼 갖고 싶은 걸 사달라며 길바닥에서 뒹구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미안한 마음이 때로는 엉뚱하게 나타나기도 했는데 네가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사진관에 놀러 온 너를 명동에 있는 수제 고급 제화점에 데리고 가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구두를 사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일로 어찌 아버지에게 위로가 되랴. 차라리 너와 네 동생이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악을 써가며 보채기라도 했으면 덜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작은 아이가 대학학자금 빌린 걸 아직 못 갚았더구나.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젠데 지금도 갚아나가고 있더구나. 얼마 전 맥주 한잔하며 미안하다고 했더니 펄쩍 뛰며 하는 말이 아버지를 슬프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왜 미안해요? 아버지는 저 낳아주고 키워준 것으로 아버지 의무 다한 거예요. 별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 정 미안하면 술값 아버지가 내세요."
작은 아이가 "아버지 아버지"하며 장난스럽게 부른 게 아예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굳었다만 아버지의 이런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너희들을 사람답게 제대로 키웠다는 자부심 또한 만만치 않다.
너희들과 인사동 찻집에서 일이 생각나는구나. 유자차를 시켰는데 차를 내오던 중 파리 한 마리가 찻잔에 빠진 모양이다. 그걸 본 작은 애가 조심스럽게 파리를 건져내더니 다치지 않게 맑은 물로 헹구더구나. 잠시 후 손바닥 위의 물기가 마른 파리는 날아가고 작은 애의 말 한마디에 아버지는 "뭐 이런 놈이 있나?"하며 내심 놀랐다.
"익사할 뻔했군! 하필이면 내 찻잔에 빠져 죽으려고 그래? 자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만 내 눈에 안 뜨이는 데 가서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해라. 내 앞에서 죽는 꼴은 못 본다 이놈아."
아버지가 작은 애의 하는 짓을 보며 놀란 건 아무리 파리지만 생명을 귀히 여기는 태도와 찻집 아가씨에 대한 배려였다. 파리를 건져 맑은 물로 헹구어 날려 보내는 모습은 가히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고 찻집 서비스하는 아가씨 무안할까 무슨 일이냐 묻는 아가씨에게 별일 아니라며 쿠키를 새로 주문하는 모습은 아버지의 가슴에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오르게 하는 감동이었다.
'과연, 과연 아버지 딸들이다.'
이런 딸들을 둔 아버지가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너희 친구들이 아버지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고 팔짱을 끼고 같이 다니냐며 부러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큰 애 너는 한창 어려울 때라 그러질 못했다만 작은 애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목욕탕에서 온몸에 비누칠하고 목욕을 해가며 몸으로 쌓은 신뢰감이 너희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아버지와 딸 사이를 만든 것 같구나.
"사랑한다 나의 딸들아. 아버지가 아끼는 시 하나 감상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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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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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 딸들아, 너희들은 갖고 싶은 것도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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