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가 사라진 후 퇴원하고 집에 와서의 생활조차 암담했다. 누가 엄마를 돌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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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사라진 후 퇴원하고 집에 와서의 생활조차 암담했다. 누가 엄마를 돌볼 것인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실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할 때까지 두 달여를 오빠와 내가 번갈아 간호했다. 낮에는 내가 하고, 밤에는 오빠가 퇴근해서 간호했다. 약제 때문인지 오랜 기간 중환자실과 큰 수술을 겪으며 정신적인 충격으로 겪는다는 섬망(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착란) 때문인지 헛소리를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오빠와 나는 지쳐갔다.
처음 엄마가 쓰러졌을 때 이제부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에게 신경을 쓰고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두자고 맹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지쳐가던 오빠와 나는 급기야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자식들이 간병을 하니 아빠는 내심 안심을 하시고 좋아하시는 눈치셨는데 간병인을 쓴다니 실망하셨다. 그래도 가족이 해야지 남에게 맡기면 되겠냐며 계속 하기를 바라는 눈치셨지만 도저히 더 이상은 나도 오빠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결혼 생활을 하는 나는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집은 개판이 돼버렸다. 남편이 매일 일찍 퇴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이들은 챙겨주지 않으니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시험도 엉망이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복불복이라는데 엄마의 간병인 분은 좋은 분이었다. 운동도 시켜주셨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말동무도 되어주시고. 그야말로 좋은 분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은 신씨라 언니동생하며 잘 지내주셨다.
엄마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하였다. 요양병원으로 갈 것인지 집으로 모시고 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그러나 선뜻 어느 하나 정해지지가 않았다. 요양병원으로 보내기엔 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집으로 모시고 가기엔 엄마의 상황이 누군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시간이 되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된다 한들 이제는 자신도 없었다. 처음에는 요양병원을 반대하고 집으로 모시자고 했던 오빠조차 두 달여의 병원 야간 간병을 하더니 요양병원이 전문적이고 의료진도 있으니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세상밖으로 나온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혼자서는 절대 살아가지 못하는 아기가 기어다니고 앉고 걷고 뛴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고 사회생활을 한다. 내가 내 아이를 낳아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길러 주셨다.
이제는 엄마가 아기가 되셨다. 자식인 내가 어릴 적 엄마처럼 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자식인 나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요양병원만을 검색하다 자괴감에 한숨을 짓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를 돌봐주셨던 엄마처럼 엄마가 좋아하는 봄꽃도 보여드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잔치국수도 해 드리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없다. 두 아이를 기르는 나도 엄마인데도 말이다.
요양병원을 검색하다 읽은 어느 댓글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요양병원에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넣어두고 아주 가끔 들여다본 후 돌아가셨다 연락 오면 무덤덤하게 장례 치르는 게 무슨 공식 같다'고.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안타깝게 다가오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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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살려달라" 했는데, 요양병원 알아보는 게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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