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지독한 추억이 어린 교재 <영어완전정복>
김경수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다1986년 가을, 탈선의 방정식을 못다 풀고 입대했던 군대를 제대했다. 여전히 방향을 잃고 빈둥거리던 1987년 봄, 불현듯 '자본금 안 드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마지막 심정으로 어머니께 부탁 말씀을 드렸다. '반찬은 필요 없으니 맨 도시락에 하루 5백 원씩 몇 달만 지원해 달라'고.
다음날 서울 안국동의 정독도서관을 찾아갔다. 입장료 50원, 교통비 90원*왕복=180원, 아부라기 국물 50원*2그릇=100원 그리고 솔담배 450원. 500원으로 하루 경비의 수지가 맞지 않아 담배는 모래판에 꽂혀있는 꽁초를 뽑아 폈다.
공부는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게 상책이다. 며칠 후 정독도서관 정문 앞 헌책방에서 <영어완전정복> 6권을 집어 들었다. 1학년 1학기 책의 본문 첫 페이지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된다. 3학년 2학기 책까지 총 3천 페이지 가까운 이놈들을 꼼짝 않고 정독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다시 정독을 했다. 보름이 걸렸다. 또다시 일주일 걸려 3번째 정독을 마치고 나니 천하를 얻은 것만큼 기뻤다. 벽돌 하나하나로 초석을 쌓는 심정으로 불같이 책과 씨름한 끝에 대학입시와 공무원 채용시험 모두 합격했다. 학원비 한 푼 안 들이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투자 자금 없이 시작한 사업치고는 성공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