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가지의 모습높낮이 없이 일정한 높이의 지붕만 이어지는 시가지의 모습은 단조로워 그런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강재인
"몽은 산이고 마르트르는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의 마터(martyr)와 같은 단어죠?"
딸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아빠는 손을 꼭 잡으며 대답하셨다. 몽마르트르의 호칭은 순교자의 산이란 뜻을 지닌 Mons martyrium이란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이유는 생 드니라는 가톨릭 주교가 서기 250년 순교한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바로 그런 이유로 몽마르트르에 수녀원이 세워졌던 모양이다. 아까 내가 내린 아베스역의 아베스(abbesse)나 그 부근에 있는 아베스광장의 아베스도 한때는 이곳에 설치되었던 수녀원의 흔적을 반영한 단어다. '수녀원장'이란 뜻의.
"이상해요. 순교자의 산 위에 수녀원이 지어지고, 다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세워지고..."
"살다 보면 땅에도 그런 운명 같은 게 있더구나. 한때는 이 일대가 다 밀밭이었다는데..."
"수녀원은 프랑스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수녀원에서 경작하던 밀밭이나 채소 밭도 모두 사라졌는데, 어떻게 이곳이 프랑스 현대예술의 발상지가 된 거에요?"
아빠는 도심과 다름없이 집들로 꽉 들어찬 일대를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집값 때문이다. 서울도 그러지 않았냐? 도시 재정비로 서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그와 똑같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파리에선 1854년에 일어났던 거야. 당시 파리 시장인 오스만 남작이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허름한 집들을 모조리 부수면서 도심 땅은 전부 부자들 차지가 되고 서민들은 변두리 달동네로 쫓겨나게 된 거지. 그 달동네가 바로 지금의 몽마르트르다. 그때 가난한 예술가들도 서민들을 뒤따라 이 달동네에 삶의 웅지를 틀었다는 얘기야."
"지금도 차고나 창고 또는 버려진 공장지대에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 만들어지는 일이 많아요."
"하긴 예술이 당장 돈 되는 일은 아니니까. 인구 유입으로 집들이 자꾸 늘어나면서 밀밭이 줄어드니 풍찻간 일감도 줄어들게 되었지. 그러자 방앗간 주인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짜냈어. 방앗간 부속건물을 개조해 싸구려 여관 겸 음식점을 열기로.
거기서 자신만의 레시피로 둥근 케이크 곧 갈레트를 구워 팔기 시작했는데, 이 갈레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상호를 아예 '갈레트 풍찻간'으로 바꾸었지. 주말이면 앞마당에서 무도회를 열었어. 열 명도 넘는 악사들이 흥겨운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좋은 옷을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이 이 무도장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왈츠를 추거나 담소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했지."
"그럼 그게?" 내가 지피는 게 있다는 듯이 말하자 아빠가 눈빛을 빛내셨다.
"그래, 바로 그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이 르누아르의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야. 그 장소로 가볼까?"
나는 앞장서시는 아빠를 뒤따랐다.
[아빠의 이야기] 낮과 밤의 풍찻간
사크레쾨르 대성당 뒤쪽으로 돌아가서 아래로 내려가니 카페들이 보이고, 그 앞쪽에 이젤을 빽빽이 세운 무명화가들이 자리 잡은 테르트르광장(Place du Tertre)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