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티저영상 스틸컷
광화문시네마
세상살이의 치트키라는 금수저가 아닌 이상 우리는 마냥 자유롭게 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제한된 '선택'이다.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하고 남는 20만 원으로 노후대비연금을 들지, 여행을 갈지, 술을 마실지를 선택한다.
게다가 언제나 대가도 있다. 좋은 아파트에 사는 미소의 후배는 20년간 아파트의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부유한 남편과 결혼한 미소의 친구는 남편 눈치를 보느라 절절맨다. 모두 저마다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누군가의 선택은 '안정적'이라 인정받고 또 다른 누군가의 선택은 '취향'이라 차별받는다. 미소는 집에서 오는 안정성보다 취향을 즐김으로써 얻는 위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미소에 대한 세상의 폭력성은 집요하다.
사실 영화에서 친구들의 삶의 방식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몸을 혹사하며 일하는 문영, 무리해서 아파트까지 얻었는데 갑자기 이혼당한 대용, 적성에 맞지 않는 전업주부 일 때문에 괴로운 현정, 부유한 집에 시집가 남편 눈치 보며 사는 정미의 삶은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조언 역시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담배와 위스키를 끊고 그 돈을 모아 월세방이라도 마련해보라는 정미의 조언은 내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기도 했다.
취향은 당연히 '집'보다 후순위가 되어야 할까 다만 중요한 것은 미소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데 있다. 좋은 집, 안정적인 직장, 성공적인 커리어는 인정할만한 것으로 취급하고 담배나 위스키 같은 취향은 부차적인 것으로 미뤄진다. 취향은 당연히 '집'보다 후순위가 되어야 하는 걸까?
저마다 자신의 선택을 감내하며 산다. 미소가 담배와 위스키를 끊지 않고 끝내 한강 공원에서 텐트를 치며 살기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선택이 우리에게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취향을 선택하는 것도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