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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리에서 교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날 이후 낯선 자리에서는 웬만하면 교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서로 통성명을 하다보면 흔히 직업을 묻곤 하는데, 그럴 때에도 그럭저럭 먹고 산다며 눙칠 때가 많다. 경험상 술자리에서조차 교사가 끼면 서로 말 꺼내기 부담스러워하니, 애초 밝히지 않는 게 피차 편하다.
교사를 향한 국민적 불신은 어느덧 '놀이'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교사는 부도덕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낙인찍힌 채 온갖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직업으로 전락했다. 종종 언론에 등장하는 미담 사례조차 교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폄훼되기 일쑤고, 처우를 문제 삼으며 아예 급여를 깎자거나 교직을 비정규직화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촌지나 밝히는 무능한 교사'라는 뿌리 깊은 불신은 교사 스스로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헌법이 보장한 대로 정치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전문성을 살려 교육의 주체로 나서본 경험이 거의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이다. 상명하달의 권위주의와 관료문화에 젖어 '스승'으로서의 소명의식조차 희미해지며 시나브로 자존감을 잃어갔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수십 년 동안 교사 집단을 수족처럼 부렸고, 이에 맞서는 교사들에게는 해직이라는 철퇴를 가했다. 아이들에게 정의를 가르쳐야 할 교사들에게 승진과 수당을 미끼로 침묵을 강요했고, 온존한 학벌구조는 아이들과 학교를 줄 세우며 교사 집단을 더욱 파편화시켰다. 기나긴 굴종의 세월을 보내며 많은 교사들이 '물라면 무는' 존재로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학교에는 촌지라는 단어조차 어색해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교사가 훨씬 많다.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기레기' 언론들의 자극적인 기사로 부각된 것일 뿐, 묵묵히 아이들 곁에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감히 단언한다. 교사가 많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인 건, 그저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전국 초중고 교사 수는 얼추 40만 명에 이른다. 그들 중엔 아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인군자 같은 분들도 있을 테지만, 반대로 온갖 반교육적 기행을 일삼는 '양아치' 같은 교사도 없진 않을 것이다. 교사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일부의 행태를 문제 삼아 교사 집단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고 부화뇌동하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다.
어쩌면 그들은 애초 교직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교사로서의 소명의식과 자질을 제대로 평가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양성 체계와 임용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태도다. 도덕 시험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듯, 임용고시 성적과 교사로서의 자질이 정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모여 '교사 뒷담화'를 하는 건 쉽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의 자존감에 생채기만 낼 뿐 우리 교육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교대와 사범대의 커리큘럼에 문제는 없는지 관심을 갖고, 임용고시 등의 채용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보는 기회가 늘어난다면 '촌지나 밝히는 무능한' 교사도 시나브로 사라지리라 확신한다.
듣자니까, 촌지를 건네는 문화가 공립학교에 비해 사립학교에 더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립학교법' 개정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교사의 임면이 사립학교 법인 이사장의 고유 권한이다 보니 공적인 견제가 어렵고 촌지에 온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십상이다. 거친 비유이지만, 과거 뭉칫돈이 오가며 교사 자리를 매매했던 사립학교라면 촌지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빤하잖나.
스승의날, 폐지냐 존속이냐의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