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정만진
마지막 참배 묘소의 주인은 송두환 지사3․1운동 후인 1919년 5월 지사는 독립운동 비밀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사재 1,300원을 들여 대구와 신의주에 2채의 가옥을 매입했다. 1920년 5월에는 경북 달성에서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수성면장 서재문의 협조를 얻어 2,350명의 농민 회원을 규합, 국산품 장려와 농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썼다.
1919년 9월 무기 구입과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입한 후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귀국했다. 만주에서 구입한 권총과 (독립운동에 협조하지 않으면 처형해도 좋다는 임시정부의 지시가 담긴) 사형 집행장을 들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으며, 1920년 12월 김종철·김봉규에게 권총과 사형 집행장을 교부하여 이들로 하여금 경남 합천과 의령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게 했다.
신간회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
신간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 진영 사이에 타협을 통해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단결을 공고히 한다,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등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던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 결사체로서 늘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는 1928년 말 국내․외에 143개 지회와 3만 회원을 확보할 만큼 성장했다. 일제는 마침내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간회의 총회를 한 번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에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면서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했다. 일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신간회는 '광주 실정 보고 민중대회'를 서울에서 대규모로 열어 일제의 올바르지 못함을 규탄하기로 했다.
대회일은 12월 13일로 잡혔다. 일제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를 요청했다가 신간회가 받아들이지 않자 44명의 간부를 체포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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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중 신의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4월 23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8월 29일 가출옥하였다. 지사는 출옥 후인 1923년 1월에도 정동석(鄭東錫, 신암선열공원 안장 독립지사)에게 권총과 실탄의 보관을 위임하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3일 최윤동․이수영․노기용 등이 경북 군위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제에 체포되면서 송두환도 다시 체포되었다. 3년 전 송두환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종철․노기용 등이 경남 의령에서 일본인 순사 카이(甲斐)를 사살했었는데, 군위에서 체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송두환은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9월 3일 (달성공원 앞, 구 원화여고 자리) 조양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창립 총회에서 간부로 선임된 이래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30년 11월 9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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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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