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독립지사 외삼촌

[대구 신암선열공원 답사 마지막 회] 허발, 박재헌, 이헌일, 송두환 지사

등록 2018.05.11 09:56수정 2018.05.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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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발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허발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정만진
허발 지사, 박재헌 지사, 송두환 지사의 묘소를 참배하면 신암선열공원 내에 있는 쉰두 분의 묘소를 모두 참배한다. 세 분 중 33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허발(許坺)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허발 지사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아무 안내가 없다. 묘소 앞 표지석에는 '무후로 인한 서훈 미취득'이라 새겨져 있다.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표창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발 지사는 이육사의 외삼촌


허발 지사는 이육사 시인의 외삼촌이다. 허발 지사가 민족시인 이육사의 외삼촌이라는 사실은 묘소 앞 비석을 꼼꼼하게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급' 정보이다. 보통의 답사자들은 비문을 잘 읽지 않지만 필자는 오늘도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해독하여 독자들에게 전파한다. 독립운동정신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충정 때문이다.(아래의 인용문은 비문 그 자체는 아니며 필자가 뜻을 중심으로 줄이고, 일부 내용은 보태기도 한 것이다.)

을사오적


조선 말기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을 불법으로 체결할 1905년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즉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을 흔히 '을사5적'이라 부른다.

"허발 선생은 1872년 7월 19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지금은 구미시) 임은리에서 (일찍이 의병을 일으켰고,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한) 범산 허형 선생과 진성 이씨 부인 사이에서 3남 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기로 시서에 능했으며,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해 암살된 1895년의) 을미사변 후 일어난 창의에 대소 일가가 모두 참여하게 되자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도 운명 지어졌다. (중략) 

강직하고 결단성 있는 성품을 지닌 선생은 끝내 왜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1915년 3월 15일 동생 허규와 큰집조카 등 가솔을 인솔하고 남만주 통화현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만주에는 이미 왕산 공(허위)의 유족이 먼저 가 있었고, 성산(종숙 허훈) 선생은 재만 한족의 자치 기관인 부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당시 통화현에는 성산 선생과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 민족 지도자들이 조국 광복의 염원을 키워가고 있었다. 허발 선생은 이곳에 도착 후 종숙 성산을 도와 1918년 (중략) 남만주 거주 동포 30만의 민생 교육과 군사 관련 제반 실무를 관장하였다.

 신암선열공원 입구
신암선열공원 입구정만진

의병 봉기에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쾌척한 뒤 북녘 땅에서의 풍찬노숙을 즐거이 택한 망명 생활은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동지적으로 결속시켜 허발 선생 일가와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은 이른바 겹사돈이 되었다.
허발 가문과 이상룡 가문의 겹사돈


허발의 누이 허길은 진성이씨 이황의 13대손 이가호와 결혼했다. 허길은 이육사의 어머니이다. 임청각(이상룡 가문) 출신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진성이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허발의 딸 허은(許銀, 1907∼1997)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가 된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간 허은은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남편 이병화를 잃는다. '20여 년을 만주벌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귀국한 남편은 모진 고문 등으로 병을 얻어 약 한 첩 못해 먹고 (1952년 6월 8일) 46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남겨진 것은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장례 치를 관 하나 살 돈도 없는 가난이었다(수원일보 2012년 8월 21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10월 백두산 동북쪽의 두만강 상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6월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이 두만강 하류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독립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제는 자극을 받아 대규모의 병력을 남만주에 출병시켰다. 연이어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만주 참변'을 일으켰다. 민간인의 피해를 우려한 독립군은 주둔지를 러시아 영토 내로 옮겼는데, 처음에는 우호적이던 러시아 군대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이후에는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총격을 가해 많은 독립군이 죽는 '자유시 참변'이 1921년에 일어났다.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의 일가는 1921년 북만주 철영하로 일시 피난 중 그곳에서 범산 선생의 임종을 당해 다시 한번 망국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당시 선생의 아우 이규는 국내에 잠입해 3‧1운동 거사에 힘을 보탰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에 있었다.


 입구에서 바라본 신암선열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신암선열공원정만진

그 후 일가는 하얼빈 남쪽 오산현으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선생은 자신의 호를 딴 '일창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다시 동지들을 규합했다. 연락처 역할을 한 이장년 등 제씨와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광복 후 성재 이시영 선생과의 유별한 우정도 이때의 교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30년 12월에는 부인 산운 이씨를 여의었다. 다음해 일제의 만주 감점으로 활동 근거를 잃게 되자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동생의 옥바라지라도 하겠다면서 60 나이에 시름겨운 발길로 압록강을 건너와 은둔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중략) 선생 일가의 항일 투쟁은 선생의 생질인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 형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하략)"

계성학교 3학년 때 대구만세운동 참여

허발 지사 묘소의 서쪽에 안장되어 있는 31번 박재헌(朴在憲)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박재헌 지사는 1900년 1월 25일 달성군 화원'면' 산곡동 536번지에서 출생하여 1986년 2월 28일 타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 계성학교 3학년이던 그는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재헌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박재헌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정만진
박재헌은 평양 숭실학교로 전학해 있던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들이 입국하자 선교사들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 후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국내에 몰래 들어와 달성군을 중심으로 경북 지방에서 '독립 공채'를 모집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때 그는 영문과 국문으로 <자유>지를 간행하여 미국 선교사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을 호소하였다.

'경북 의열단 폭파 사건'을 계획

1925년 밀양 집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재헌은 의열단 단원 고인덕과 함께 폭탄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경북 의열단 사건'은 성공하지 못했고, 박재헌과 고인덕은 모두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형무소 탈옥을 기도, 박재헌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고인덕은 붙잡혀 마침내 옥사했다.

1926년에도 박재헌은 대구의 미국 선교회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1937년에도 그는 중국의 대한독립군 상황을 선교사들에게 알리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41년 12월 다시 일제에 체포되어 재차 투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재헌 지사의 묘소
박재헌 지사의 묘소정만진

박재헌 지사 묘소의 서쪽에 30번 이헌일(李憲一) 지사의 묘소가 있다. 보훈처 공훈록은 이헌일 지사에 대해 '생몰년도 : 1917. 3. 25.~1979.4.17. / 출신지 : 대구 / 운동 계열 : 광복군 / 훈격(연도) : 애족장(1990) / 공적 내용 : 부양에서 광복군 제3 지대에 입대하여 적 후방 지하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비문을 읽어 이헌일 지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겠다. 비석 앞면부터 읽는다. '愛國志士 一松 李憲一 公 配 姜金玉 執事 合窆之墓'라는 글자가 두 줄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애국지사 일송 이헌일 공'과 '배(아내) 강금옥 집사'를 '合窆'한 '묘'라는 뜻이다. 합폄(合窆)은 흔히 쓰는 합장(合葬, 한 무덤에 부부를 함께 묻음)과 같은 의미로, 하관(下棺, 관을 무덤 안에 내림)을 함께 했다는 말이다.

 이헌일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이헌일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정만진
이헌일 지사에 대한 소개는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 한자가 많지만 우리말 발음으로 바꾸어서 옮겨본다.

"단양 이씨의  후예로 1917년 3월 25일 평안북도 신의주 노송동에서 태어나 누이와 아우 3남매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민족사상과 조국독립에 대한 정신을 길렀다. 1937년 20세의 나이로 청주 봉천을 거쳐 서주에 도착하여 1938년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1년 4월 한국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장군 명의로 된 임명장을 받고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서주 고진 봉천 상해 등지에서 군사 기밀을 탐지하여 중국 유격대에 정보를 제공하는 등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군으로 복무하고 있는 조선인 청년들의) 탈출 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44년 윤창호 동지와 접선하여 귀덕 호연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지대 본부로 귀대하여 북경 청진 지구에서 김광은, 이정수, 이윤하 선배 동지들과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지대 본부 부관실에서 복무하다가 1946년 광복군 복원에 따라 상해를 거쳐 귀국하였다.

1951년 강금옥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63년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공인되었다. 1969년 4월 17일 대구시 대명동에서 예순셋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1970년 12월 2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005년 2월 22일 강금옥 집사가 일흔넷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25일에 합장을 했다. 항상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시던 이헌일 공과 강금옥 집사 여기에 잠들다."

 송두환 지사의 묘소
송두환 지사의 묘소정만진

이헌일 지사의 묘소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신암선열공원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쉰두 분 독립지사의 유택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참배하게 되는 마지막 묘소가 남아 있다. 29번 묘소의 주인은 송두환(宋斗煥, 1892.11.9.~1969.5.28.) 지사이다.

송두환 지사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신암동 1215번지에서 출생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서울 보성학교에 다녔던 송두환 지사는 1914년 고향에서 정운해·최윤동 등과 항일 비밀 결사 신배달회(信倍達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신배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보복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여 민족의 힘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창립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송두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송두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정만진
마지막 참배 묘소의 주인은 송두환 지사

3․1운동 후인 1919년 5월 지사는 독립운동 비밀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사재 1,300원을 들여 대구와 신의주에 2채의 가옥을 매입했다. 1920년 5월에는 경북 달성에서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수성면장 서재문의 협조를 얻어 2,350명의 농민 회원을 규합, 국산품 장려와 농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썼다.

1919년 9월 무기 구입과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입한 후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귀국했다. 만주에서 구입한 권총과 (독립운동에 협조하지 않으면 처형해도 좋다는 임시정부의 지시가 담긴) 사형 집행장을 들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으며, 1920년 12월 김종철·김봉규에게 권총과 사형 집행장을 교부하여 이들로 하여금 경남 합천과 의령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게 했다.

신간회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신간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 진영 사이에 타협을 통해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단결을 공고히 한다,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등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던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 결사체로서 늘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는 1928년 말 국내․외에 143개 지회와 3만 회원을 확보할 만큼 성장했다. 일제는 마침내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간회의 총회를 한 번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에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면서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했다. 일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신간회는 '광주 실정 보고 민중대회'를 서울에서 대규모로 열어 일제의 올바르지 못함을 규탄하기로 했다.

대회일은 12월 13일로 잡혔다. 일제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를 요청했다가 신간회가 받아들이지 않자 44명의 간부를 체포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해산되었다.

활동 중 신의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4월 23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8월 29일 가출옥하였다. 지사는 출옥 후인 1923년 1월에도 정동석(鄭東錫, 신암선열공원 안장 독립지사)에게 권총과 실탄의 보관을 위임하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3일 최윤동․이수영․노기용 등이 경북 군위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제에 체포되면서 송두환도 다시 체포되었다. 3년 전 송두환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종철․노기용 등이 경남 의령에서 일본인 순사 카이(甲斐)를 사살했었는데, 군위에서 체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송두환은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9월 3일 (달성공원 앞, 구 원화여고 자리) 조양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창립 총회에서 간부로 선임된 이래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30년 11월 9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이상으로, 16회에 걸쳐 연재한 신암선열공원 안내를 마칩니다. 대구의 신암선열공원은 2018년 5월 1일부터 국립묘지로 승격된 곳입니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의 많은 방문을 바랍니다.
#이육사 #송두환 #신암선열공원 #이헌일 #박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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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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