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만 지사의 생가는 가창면 행정리 91번지, 즉 (도로명 주소) 가창면 퇴계길 99-4로 알려진다. 사진의 버스 정류장 왼쪽에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며, 마을은 버스정류장 뒤편에 있다. 그러나 생가는 멸실되고 없다.
정만진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동한 이경만 지사 이경만(李敬萬)은 1897년 2월 4일 달성군 가창면 행정동 91번지에서 출생하여 1983년 10월 12일 향년 88세에 별세했다. 지사는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8월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李賢壽)의 명을 받아 동지 정덕진(丁德鎭)과 함께 경북 일원에서 친일파 군수·면장 기타 관리들, 그리고 및 부호 유지들에게 경고문·물품 불구매 고지서·납세 거절 협박문 등을 발송하는 한편 이를 대구 부내(요즘의 시내) 길거리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힘썼다.
또 1921년 12월 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미국 워싱턴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한편, 특파원 이현수가 집필한 영문 <자유>지를 대구뿐만 아니라 평양·대전 등 전국 주요 각지의 외국인 선교사에게 비밀리에 배부했다. 그러던 중 1923년 1월 24일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차경석, 보천교 |
차경석은 동학혁명 당시 접주로 있다가 처형당한 차치구(車致久)의 장남으로, 그 자신도 일찍부터 동학에 가담했다. 차경석은 동학 계열의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을 만나 열성적으로 활동했는데, 강일순의 사망 후 제자들이 선도교(仙道敎)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에도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선도교는 1920년 간부만 55만7700명을 임명할 만큼 교세가 커졌다. 차경석은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 뒤에 다시 보천교로 개칭)라 선포했다.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벌였다. 마침내 차경석은 친일 경향을 보였고, 교도들 중 일부가 이탈하여 새 교단을 세웠다.
그 이후 결국 교세가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6년 차경석이 죽으면서 보천교는 총독부에 의해 사실상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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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교도로서 독립운동을 한 서보인서보인(徐輔仁)은 1895년 5월 6일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에서 태어나 1960년 3월 20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사는 1930년경 차경석(車京錫)이 교주로 있던 보천교(普天敎)에 가입했다. 1940년 2월 독립운동 성향의 보천교도들이 전북 정읍을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1940년 11월 9일경 신인동맹의 중심인물 정인표(鄭寅杓)로부터 신인동맹의 집행 사업과 나라가 독립되었을 때 사용할 인장 220개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실행하여 이를 동맹원들에게 분배하였다. 그후 활동이 드러나 정인표 등 동지들과 함께 1940년 12월 15일 체포되었고, 1943년 10월 1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