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클로저 운동 때 사용된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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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재산을 가로채 부를 축적하는 대규모 현상이 불과 70년 전 대한민국에서도 있었다. 소수가 대중의 것을 가로채는 일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불과 70년 전에는 이 일이 아주 '대규모로' 벌어졌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땅에서 두각을 보인 기업의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였다. 한국인 기업도 있었지만, 미미한 편이었다. 그래서 산업자본 대부분은 일본인 것이었다.
1987년 제정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서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법률도 대한민국 법률체계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28일 발포한 건국강령 제3장 제6조 '나'항은 일본인 소유 재산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적이 빼앗거나 설치한 관·공·사유 토지와 어업·광산·농림·은행·회사·공장·철도·학교·교회·사찰·병원·공원 등의 방산과 기지와 기타 경제·정치·군사·문화·교육·종교·위생에 관한 일체의 사유 자본과 부역자의 자본 일체와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일본인과 친일파의 소유물은 총독부 소유이건 개인 소유이건 무조건 몰수해 국유화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국유화한 뒤에 국민 대중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은 위 조문의 '다'항이다.
"몰수한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과 재산 없는 자의 이익을 위한 국영 혹은 공공의 집단 생산기관에 제공함을 원칙으로 함." 하지만 해방 뒤 이 법률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5년 9월부터 이 땅을 지배한 미 군정이 친일파만 살려준 게 아니다. 친일파 재산과 일본인 재산 즉 적산(귀속재산)이 반대편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도 해줬다. 친일파는 살려주면서, 적산을 친일파 아닌 쪽에 넘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사회적 권력은 돈에서 생기는데, 친일파 아닌 쪽에 돈을 넘기면서 친일파를 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 아닌 쪽에 적산이 넘어가지 않도록 미군정이 어떤 고안을 했는지에 관해,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대우교수 등을 지낸 안치용의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 군정의 귀속재산 처분이 연고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원래의 일본인 소유자에게 재산관리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거의 귀속재산의 주인이 되었다. 따라서 미군정이 처분한 일본인들의 재산은 대부분 친일 성향을 지녔던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이렇다 보니, 반미 혹은 반일 성향을 가진 기업인은 적산을 인수하기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적산이 사실상 헐값에 임의로 분배됐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급락하는 속에서 해방 이전 가격으로, 그것도 장기할부로 적산을 인수하도록 해주었다. 사실상 무상분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미·친일 성향의 그들은 국가가 서민 대중한테 무언가를 무상분배하려 하면 포퓰리즘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사실상 무상분배의 최대 특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