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지 가문의 탑상 주택 꼭대기에 잘린 탑의 흔적이 보인다. 창문에는 간이 발코니를 설치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박기철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팔라초팔라초는 15세기에만 피렌체에 백여 채가 건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부유층들은 자신과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앞다투어 팔라초를 지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예술이 재발견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인물의 지위와 세계관은 건축을 통해 표현된다'는 고대 로마의 건축관이 유행했다. 팔라초 한 채의 건축비가 현재 우리 돈으로 수십에서 수백억 원에 달했지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조반니 루첼라이는 (중략) 장부에다 적기를, "나는 돈을 번 것보다 더 많이 쓴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며, 내 영혼의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특히 집을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에 더욱 만족한다"고 했다.(손세관 지음, 피렌체-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125쪽)
팔라초는 막대한 건축비와 큰 규모에 비해 초기에는 거주인원이 적었다. 기본적으로 단일 가구를 위한 단독주택으로 주인과 직계가족, 그리고 몇 명의 하인이 있었을 뿐이다. 위에 나온 조반니 루첼라이의 팔라초에도 처음에는 직계가족 외에 남자 네 명과 여자 다섯 명만 고용되어 있었다.
피렌체에 있는 팔라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Palazzo Medici Ricardi)'이다. 1444년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미켈로초(Michelozzo di Bartolommeo, 1396-1472)에게 설계를 의뢰한다. 메디치 가문은 1456년 쯤에 입주했지만 세부 장식까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469년이었다.
처음에는 두오모 성당의 돔 설계로 유명한 브루넬레스키(FilippoBrunelleschi, 1377-1446)에게 설계를 맡겼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제출한 설계 모형은 코시모가 보기에 너무 화려했고 반대파의 비판을 불러왔다. 이에 거부감을 느낀 코시모는 미켈로초에게 설계를 다시 맡긴다. 제안이 거부당한 브루넬레스키는 몹시 화를 내며 자신의 모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린다.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에 드러난 코시모의 욕망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는 팔라초 건축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는다. 피렌체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수많은 팔라초들이 메디치 저택을 모방하여 건축되었다. 메디치의 정적들은 팔라초 메디치보다 더 크고 웅장한 저택을 짓기 위해 애를 썼다. 대표적인 정적 루카 피티(Luca Pitti)는 '팔라초 피티(Palazzo Pitti)'를 지을 때 '중정에 메디치 저택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짓고 싶어했다.
메디치 저택을 처음 마주하면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분명 3층 건물인데 현대 8층 건물과 맞먹을 정도로 층고가 높다. 처음 이 저택 1층의 동남쪽은 로지아 형태로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1517년 로지아를 폐쇄하고 벽으로 막았다.
외관을 살펴보면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다른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다. 특히 1층은 가공하지 않은 돌들을 쌓아 올린 형태인데, 매우 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방식을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이라고한다. 루스티카(Rustica)는 '거친, 촌스러운, 다듬어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 말로는 '거친 돌 쌓기' 방식이라고도 부른다.
코시모는 저택의 외관을 검소하게 짓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권력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이런 그의 욕망은 저택 2층과 3층에서 나타난다. 2층과 3층에 있는 창문들은 가운데에 문설주가 있는 둥근 아치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중세 시대부터 피렌체 주교 등 최고 권력자들만이 쓰던 양식이었다. 겸손한 듯 보이지만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임을 나타내고 싶었던 코시모의 욕망이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 후손들은 여기에 살면서 메디치 은행으로 '출퇴근'했다. 지금이야 집에서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최초로 '직주분리'의 개념을 설계에서부터 반영한 건물이었다.
이후 리카르디 가문이 1659년에 이 건물을 매입하고 규모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이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