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김종성
1970년 월드컵 당시, 홈팀 멕시코를 제외하고 북중미·카리브해 지역에 배정된 본선 티켓은 1장이었다. 그 1장을 얻기 위해 이웃나라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1969년 '홈 앤 어웨이' 경기를 갖게 됐다.
그런데 그 전부터 두 나라 국민들은 감정이 좋지 않았다. 영토는 온두라스가 엘살바도르의 5.3배인 데 비해, 인구는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의 1.4배였다. 엘살바도르의 인구밀도가 더 높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땅 없는 엘살바도르 농민들이 온두라스에 잠입해 토지를 불법 개간하는 일이 많았다. 1969년 초를 기준으로, 30만의 엘살바도르 불법 이주민들이 온두라스 전체 농지의 20%를 차지했다.
그래서 온두라스 국민들의 감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국민 정서에 밀려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이 때문에 양국 국민들의 감정이 폭발 직전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월드컵 지역예선 1차전이 1968년 6월 8일 온두라스에서 열리게 됐다.
"경기 전부터 두 나라는 달아올랐고, 온두라스 홈팬들은 엘살바도르 축구팀을 괴롭히기 위해 (선수들이 밤에 잠을) 잘 수 없도록 호텔 근처에서 급조된 축제를 벌이며 소란을 피운다." - <중남미연구> 제36권 제2호에 실린 고슬기의 '국내 소설에 나타난 중미의 축구전쟁.'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밤잠을 설친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고, 결과는 온두라스의 1-0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경기 직후, 엘살바도르에서 어느 소녀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보도되자 "축구 경기에 실망한 나머지,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는 추측성 소문이 확산되면서 엘살바도르 국민들 사이에 분노와 복수심이 확산됐다. 이 상태에서 일주일 뒤인 6월 15일, 엘살바도르에서 2차전이 열렸다.
"복수심으로 무장한 성난 홈팬들은 온두라스 팀의 투숙 호텔에 죽은 쥐와 썩은 달걀 등을 던지고 소란을 피워 잠을 못 자게 한다. 안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선 온두라스 팀에게 엘살바도르는 3-0의 대승을 거둔다.""수백 명의 엘살바도르 극성팬들은 온두라스 팀의 버스를 국경까지 따라가며 폭력을 가하고 괴롭힌다. 온두라스 대표팀이 당한 피해를 목격한 (온두라스 측의) 국경 마을 사람들은 분노하여, 주변의 무고한 엘살바도르인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그중 일부는 사망하기까지 한다." - 위 고슬기 논문. 불법 이민 문제로 악화된 두 나라 국민들의 감정 상태가 월드컵을 계기로 그렇게 폭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1승 1패이고 온두라스가 1득점, 엘살바도르가 3득점이므로 지금 같으면 엘살바도르가 아이티-미국 전 승자와 최종 예선을 치렀겠지만, 그때는 그 규정이 없었다. 추가로 3차전을 치러야 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6월 27일, 제3국인 멕시코의 아스테카 스타디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에서 원정 응원 온 관중보다 멕시코 경찰 병력이 훨씬 많이 운집한 가운데 3차전이 열렸다.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엘살바도르가 3-2 승리를 거뒀다. 이날 두 나라 국민들은 멕시코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켰고, 엘살바도르는 선전포고를 발포했다. '축구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7월 14일 엘살바도르 군이 온두라스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한다. 엘살바도르 공군은 테구시갈파의 톤콘틴 공항을 폭격하여 온두라스 공군 병력의 80%를 무력화시키고, 온두라스 군보다 더 많고 정예화된 육군을 투입해서 수도로 진격한다. 7월 15일 소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수도 테구시갈파 근처까지 접근해 오자, 온두라스 군도 다음날 반격을 시작한다.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온두라스 비행편대가 낙하산을 투입하여 적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한다." - 위 고슬기 논문.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