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왼쪽)과 함께하는 사람들( 오른 쪽 끝이 저자)발달장애인 혜정과 함께 그의 자립생활에 동참하는 사람들
김병하
위에서 리뷰한 <나, 함께 산다>가 장애당사자들에 대한 인터뷰 기록이라면, <어른이 되면>은 생각 많은 언니 장혜영이 발달장애 여동생 혜정이와 함께한 400일의 '지지고 볶고 부대끼는' 일상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냥 흔한 서사적 기술이 아니다. 그 속에는 저자인 '생각 많은 언니'의 인간(동생)에 대한 연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생각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다. 생각이 철저하면 철학이 되고, 그 철학은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장혜영은 메타프락시스(meta-praxis 초실천)의 전형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인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실천이다.
흔히 발달장애나 지적장애인의 경우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부모들은 장애자녀보다 단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절실한 바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특수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인을 더 이상 가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워 수용시설에 보내기 십상이다. <어른이 되면>의 주인공 혜정이도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본래 장애는 '치료' 가능한 게 아니라, 부단한 경험에 의해 조금씩 좋아질 뿐이다. 하지만 발달장애 자녀를 둔 혜정 어머니는 혜정이가 '어른이 되면' 정상으로 회복 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일 뿐, 혜정의 발달장애는 오롯이 현실문제로 그냥 남겨진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당사자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될 문제가 아니다. 장애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수용(포용)하고 감당해야 할 실존적 문제이자 당대사회의 문제다. 그래서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는 장애당사자가 '장애를 장애로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이른바 '장애의 벽이 없는'(barrier free) 사회를 제기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세상에서 자기만큼 혜정이를 잘 돌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생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설로 보내진 후, 그 결과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은 동생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격리는 사라진 혜영이와 남아 있는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의 마음속에 어둠이 밀려왔다. 이제는 그 어둠이 자신의 그림자처럼 다정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 즈음 저자는 '혜정이에게 다시 돌아가야 해'라는 내면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내 생각 많은 언니는 "혜정이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린 나의 일부를 되찾기 위해 나는 시설로 향했다"고 고백한다.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생각 많은 언니의 성찰은 이렇게 이어진 게다.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해 시설에 온 혜정이는 시설 안에서도 한없이 소외되었다. 혜정이라는 한 인간의 삶은 늘 혜정이를 돌보는 사람들의 삶보다 무게가 덜 나갔다. 시설에서 혜정이와 같은 발달장애인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물' 같은 존재처럼 간주되었다. …(중략) 그렇게 격리된 혜정이의 삶을 '그 또한 하나의 삶'이라고 수긍해버린다면, 이 사회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합법적으로' 사회 밖으로 추방해버릴 수 있는 곳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 <어른이 되면>, 37쪽.
모든 인간에게 '자유'는 자기존재 이유다. 저자는 동생의 자유를 그냥 운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여 혜정의 자유는 스스로 관리되고 쟁취해야 할 인권의 문제다. 생각 많은 언니에게 혜정의 탈시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자 삶의 문제로 다가왔다. 시설은 집단적 통제와 순육(順育)을 제공하는 격리된 공간이다. 하여 바깥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시설문화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8년 만에 다시 함께 살기로 한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혜은과 혜정 자매는 월세를 얻어 이사를 한다. 비로소 혜정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자립생활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삶은 관계의 연결이다. 이제 두 자매는 서로간의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삶의 망을 짜나가야 한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생각 많은 언니, 저자에게 '연약하다는 것'은 발달장애인 동생과 삶을 이어가는 데에 섬세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에게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늘 섬세하게 바라보는 연습이다. 하여 저자는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언젠가 내가 연약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랬다.
'발달장애'(developmental disability)는 인간발달이 다양하고 섬세하며 끊임없는 과정(현재진행형)임을 상기 시킨다. 원래 '발달장애'는 의학적으로는 뇌 발달의 문제이지만, 교육적으로는 독특한 학습스타일과 학습속도의 문제이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발달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발달장애인은 멈춰선 사람이 아니라 더디긴 하지만 변화(발달)하는 사람"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리라"(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했다. 하여 이렇게만 하게 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현명해지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건하게 될 것"이라 했다. 필자가 보기에 <중용>의 이 말은 바로 발달장애인을 향한 경구처럼 들린다. '우리 아이는 안 된다'는 부모의 조급증, 그리고 참고 기다려주는 교사들의 인내와 관용 부족이 발달장애아의 학습장애를 재생산한다.
동생 혜정에 대한 연민과 체험에서 우러난 저자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일단 함께 살아가기'라고 대답하고 싶다"고 했다.
"혜정이와의 삶에서 나를 정말로 어렵게 하는 것은 혜정이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보다 혜정이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안(덜) 된 이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살면 살아진다."
모든 장애인은 우리가 함께 살면, 살아진다. 인간은 네가 있음에 내가 있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다. 생각 많은 언니는 혜정과 함께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는 쾌감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 속에 삶의 자유가 숨 쉰다. 저자는 동생 혜정과 함께 사는 길을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평생을 걸어도 다 걸을 수 없을 만큼의 길이 있다. 모든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지만,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중략) 나는 혜정이를 향해 걸었고, 이제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나는 혜정이의 몇 걸음 뒤에서 걷고 있다. 나란히 걸으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혜정이를 끌고 가게 될 것 같아서 그렇다. - <어른이 되면>, 195쪽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어린 연민을 품는다면 우리네 삶은 더 많은 신비로움을 드러낼 게다. 생각 많은 언니에게 혜정이는 짜증나는 동생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해달라는 것은 끝없이 많은 동생이다. 하지만 언니는 열 받게 하는 동생의 연약함을 사랑한다.
혜정이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성역(聖域)이다. '성역'은 성스러운 곳이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범할 수 없다. 우리에게 삶은 신비다. 함께 살면, 살아진다. 생각 많은 언니는 발달장애 동생 혜정과 그 삶을 당대사회에서 목하 체현해 가고 있다.
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우드스톡, 2018
나, 함께 산다 -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
서중원 구술, 정택용 사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기획,
오월의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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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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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로 간 장애인이 사회로 나오면 알게 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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