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위드유누군가 붙인 위드유 포스트잇
이정진
미투가 졸업할 수 없는 이유
실제로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들은 예린과 같은 문제에 처해있다.
첫째, 피해자 보호장치가 부족하다
학내 성폭력전담기구는 허울뿐이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상담직에 전담인력을 배정한 비율은 전체 대학의 7%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2015년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전국 95개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 상담원을 설문 조사한 결과, 상담기구 종사자의 53.7%는 기간제 계약직이었다.
둘째, 가해자를 지지하는 문화다조사과정에서 피해자를 탓하는 질문들이 그 예다.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거나 저항 여부를 캐묻는 건 조직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가부장적 통념에 기반한다.
<강간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
◆ 여성이 저항하는 한 강간은 매우 어렵다.
◆ 따라서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남성이 그 저항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압했을 때 강간의 범죄가 성립한다.
한인섭,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 한국성폭력상담소, 2007
이러한 통념으로 인해 가해자는 면피를 받고 피해자가 자책하게 된다. 성폭력을 용인하는 문화가 굳어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대학 생활은 씨족사회다
성폭력 사건 이후에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멀리하기 쉽지 않다. 피해자는 '선배니까, 친구니까, 실수였으니까' 등의 이유로 자신의 피해를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대학 내 성폭력 문화는 뿌리가 깊다. 그렇기에 예린과 같이 개인의 의지로 학과 내부의 변화를 일으키는 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한 학과만의 변화로 대학 내 성폭력 문화를 뿌리 뽑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책임자인 교육 기관은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책임을 저버린 교육부지난 4월 4일 교육부는 '긴급대책'을 마련했다. 교육부는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단'을 만들어 기관별 성폭력 근절 추진 상황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또 대학 내 담당 기관이 피해자를 지원하여 2차 피해를 방지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교육부가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미투 운동에 떠밀려 뒤늦게 마련한 궁여지책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학교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성폭력이 꾸준히 발생해왔다는 걸 고려했을 때 교육부의 대책은 늑장 대응이라 볼 수 있다.
실례로 교육부 홈페이지의 '성폭력 신고센터'는 미투 이전인 2015년에 만들어졌다. 신고 건수는 2015년 2건, 2016년 19건, 2017년 7건에 불과했다. 반면 교육부가 발표한 학내 성범죄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대학에서 적발돼 보고된 성폭력 건수가 320건이다. 적발된 성폭력 사건의 수보다 신고 건수가 현저히 적다. 이는 교육부가 성폭력 대응과 예방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2008년에는 1998년에 설치했던 교육부 내의 '여성정책담당관실'이 폐지됐다. 여성정책담당관실은 대학의 성폭력·성희롱 사건처리 매뉴얼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현재는 교육부 산하 민주시민교육과에 초·중등학교 양성평등 교육을 담당하는 한 명의 직원밖에 없다.
출처 : 이미정·장미혜·김보화, 대학 내 성폭력·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방안 연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2012
대학은 성폭력에 취약하다. 대학은 유독 학업, 진로, 생활,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엮여있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대학 내 성폭력은 피해자의 생활과 학업을 직접적으로 침해한다. 반면, 그동안 교육부가 마련한 대책은 소극적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학교와 교육부로 대표되는 책임자가 그 책무를 다하지 않을 때, 피해자는 고립된다. 고립된 피해자는 가해자를 상대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연대 : 피해자의 생존 전략교육부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직접 나선 피해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연대했다.
'전국미투생존자연대'(이하 미투 연대)는 미투 피해자인 남정숙 교수가 설립한 단체다. 2018년 3월 27일 발족해 갓 100일이 넘은 연대지만, 그동안 거쳐 간 피해자만 60~70명에 달한다. 미투 연대는 생존자의 자조 모임으로서 피해자들끼리 성폭력 사건을 스스로 해결하고 치유하는 곳이다.
미투 연대는 이름부터 기존의 단체들과 다르다. 그들은 '생존'을 택했다. 죽음으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미투 운동 이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살아남아' 또 다른 피해자를 돕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 회원은 "개인이 회사나 학교 조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경험한 후로 미투 연대에 참여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