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에게 "언제 실수했냐" 묻는 사회

[리뷰] 일본 사법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이토 시오리의 논픽션 '블랙박스'

등록 2018.08.27 10:34수정 2018.08.2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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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로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이토 시오리는 일 때문에 알게 된 유명 방송국의 간부 야마구치 노리유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경찰에 신고, 사건이 접수됐지만 불기소로 종결됐다. 검찰의 결정에 납득할 수 없었던 이토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다.

<블랙박스>는 이토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성폭행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인식과 사법 제도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미투운동과 더불어 여성운동이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지금, 주목해야 할 책이다.


"나는 파괴의 순간을 체험했다"

 <블랙박스>
<블랙박스>미메시스

2015년 4월 3일, 이토 시오리는 심한 고통 속에서 눈을 뜬다. 무거운 무언가 아래 깔려 있었다. 업무 차원에서 만난 야마구치 노리유키 TBS 워싱턴 지국장이 바로 그 '무거운 무언가'였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야마구치와 함께 초밥집에 간 것이었다. 데이트 약물 강간이 의심되었다.
"성폭력은 그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공포와 고통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게 한다. 왜 내가 강간을 당했을까?" <블랙박스> 중에서
호텔방을 겨우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대로 샤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들고 통증이 심했다. 정신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고 기억을 잃은 것에 혼란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쁜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 있는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나의 의사에 반하여 가해진 성행위와 폭력적 행동으로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존재가 지배되고 있었다는 공포였다. 기억이 없는 것이 몸시 무서웠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을 몸뚱이가 다른 남에게 컨트롤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 직후, 마치 죽여진 듯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박스> 중에서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가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강간 피해를 입는 것은 "파괴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며 "영혼에 대한 살인"이기 때문이다. 이토 역시 강간 피해를 신고할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다.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으러 찾아간 산부인과에서는 "언제 실수했냐"고만 했다. 일본의 산부인과에는 레이프 키트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토는 인터넷 검색으로 성폭행 검사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NPO에 전화를 걸자 "일단 와달라"고 했다. 직접 오지 않으면 어느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뒤늦게 간호사인 친구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 역시 강간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토는 성희롱 피해로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는 친구의 조언으로 경찰서를 찾는다. 두 시간에 걸쳐 피해 사실을 털어 놓은 여성 경찰관은 교통과 소속이었고 이후 여러 명의 경찰관에게 자신이 당한 성폭행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한 끝에 신고가 접수됐다. 하지만 상급 기관의 남성 수사관으로부터 "1주일이나 지나서 어렵겠다", "자주 있는 일이라서 사건으로 수사하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담당 수사관이 초밥 가게 주인과 사건 당일 두 사람을 태웠던 택시 운전사, 호텔 직원 등으로부터 결정적 증언을 받아내며 증거를 모았지만 가해자인 야마구치 노리유키의 체포 당일 경시청 상부의 제동으로 체포가 중지됐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조차 나오지 않았던 야마구치는 결국 불기소 결정을 받았다.
"피해 신고서와 고소장에 서명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경찰에 가면 자연스레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경찰이 다 조사해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돌아오는 것은 '어렵다'와 '안 된다'는 말이었다. '사실'이란 이토록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블랙박스> 중에서



"나는 피해자 'A'가 아니다"

이토 시오리는 2017년 5월 사법 기자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이 피해자인 강간 사건이 검찰의 판단으로 불기소 결정이 내려져 검찰 심사회에 심사를 요청했음을 보고하는 회견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피해자가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비로소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바를 외칠 수 있게 된 순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었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시미즈 기요시 기자는 이토에게 기자 회견을 열게 되면 "면접용 정장을 입는 게 좋다"라고 조언했다. 이토는 "입지 않겠다"고 답한 뒤 린넨 셔츠를 입고 기자 회견장에 섰다.
"다만 나는 '피해자는 단추를 목까지 채운 하얀 셔츠 차림으로 슬픈 듯이 하고 있는 법'이라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우상을 부수고 싶었다. 무엇을 입었든 입지 않았든 비난당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피해를 당한 이유로는 지목되어서는 안 된다." <블랙박스> 중에서
당당하게 진실을 알린 이토의 용기에 사람들은 박수는커녕 돌을 던졌다. 뭔가 이익을 노린 것이다, 꽃뱀이다, SM클럽 종업원이다, 야당의 정치공작이다, 재일 한국인이다, 북한의 정치공작원이다 등. 심지어는 강간에 대해 말하면서 셔츠 단추를 풀고 나왔다며 트집을 잡았다.
"기사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이름도 얼굴도 없는 '피해 여성'이었다. 나는 '피해자'라는 이 피할 수 없는 말이 따라붙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내 직업도 아니거니와 내 캐릭터도 아니다." <블랙박스> 중에서
가해자인 야마구치는 TBS를 그만둔 뒤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쓴 책 <아베>로 스타 기자가 되었다. 그의 주위로 줄을 대려는 고위 인사가 몰려 들었다.

현재 이토는 영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사법 기자 클럽 회견 이후 뉴욕타임스, BBC 등 해외 유수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과 함께 일본의 사법 시스템에 대해 고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이토는 책을 통해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추가 취재를 통해 미국과 스톡홀름 등 여러 나라의 피해 사례와 성폭행에 대처하는 사회 시스템과 사법 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든 올바른 사법 시스템이 존재해야하는지를 방증하며 사회의 인식과 제도가 바뀔 것을 촉구한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며 취재 중 알게 된 성폭행 피해자 아버지인 게이리 구드윈씨의 이야기가 다시금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보게 한다. 해병대 소속이었던 딸 캐리 구드윈은 상사로부터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조직에 이를 알렸으나 오히려 징계 제대 처분을 받고 자살한다. 가해자는 캐리를 강간하기 2년 전에도 같은 짓을 저질렀고 그 때도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그때 사법부의 정당한 심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딸은 지금 여기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블랙박스

이토 시오리 지음, 김수현 옮김,
미메시스, 2018


#이토 시오리 #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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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영상번역작가.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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