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안전판, 전기트랜스
김태완
지하 서재 책상 뒤쪽에 전기제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뭔가 하고 살펴보니 전압을 조정해주는 전기트랜스(변압기)다. 처음 이민 올 때 가져와서 아주 소중하게 썼던 물건이다. 서울에서 가져온 대부분의 전기 전자제품들이 이 기계장치를 통해 캐나다에서도 온전한 물건으로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한국은 220볼트, 캐나다는 110볼트로 전기제품을 생산해내니 이 장치 없이는 서울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민 오기 전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몇 만원을 들여 사온 물건이었다. 거기에는 컴퓨터의 본체와 모니터, 노트북, 프린터, 다리미, 휴대전화 충전기에서 인터넷전화까지 서울에서 쓰던 거의 모든 전자제품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역할을 다 끝낸 예비군처럼 한 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아무런 전기장치도 연결되지 않은 채로.
그러고 보니 올 여름을 보내며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서 산 지도 벌써 7년이 지나갔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요즘같이 모든 것이 눈코 뜰새 없이 광속으로 변화하는 시대에는 예전의 시간 흐름과 삶의 변화 속도와는 또 다른 형태의 감각과 모습으로 내 삶도 변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사실 캐나다에 온 이후로는 양복을 입을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그 변화 중 하나이다. 서울에서 가져온 양복들은 장롱에 처박혀 그저 특별한 날 선택되기를 기다려 온 지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와이셔츠며 넥타이도 새로 구입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할 일이 있어 옷장을 뒤져 양복에 타이를 매려는데 어쩐 일인지 넥타이가 목에 감기자 엄청난 답답함이 몰려 왔다. 그냥 풀고 노타이로 가려는데 아무래도 남의 결혼식이라 그냥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결혼식장 화장실에 가서 다시 타이를 매고 혼주를 만났다.
20년을 평상복처럼 입던 양복이 이렇게 어색해질 수가? 게다가 결혼식장을 메운 다른 하객들의 옷 매무새를 보니 내가 입은 양복은 뭔가 철 지난 유행가처럼 군중들 속에서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내 삶에서 뒷전으로 밀린 것들은 단지 전기트랜스나 양복만이 아니다. 7년이라는 세월은 휴대전화, 전화기, 컴퓨터, 다리미 등 내 주변의 모든 일용품들을 캐나다 현지의 것으로 바꿔 놓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무게는 마치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작은 것들을 휩쓸고 급기야는 그것들이 이곳에서도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켜오던 저 트랜스마저도 이제 더 이상의 역할이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트랜스는 서울의 삶을 토론토의 삶으로 '소프트랜딩' 하도록 만들어준 소중한 안전장치였다. 이제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그 안정 장치 없이도 이 낯선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 나는 이제 오롯한 토론토시민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민자로 사는 우리는 그 트랜스와 같은 안전판을 여기 저기에 두고 살고 싶어한다. 이민자에게 가장 큰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같은 언어를 쓰는 한인들과의 교류이다. 교회나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한인 친구를 만나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어로 신나게 대화하는 일이야말로 이민자들이 아무리 이민 생활을 오래 하더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스트레스와 위기 상황을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서로 위로 받고 메워 주는 '마지막 피난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이긴 하지만 안전판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소위 1.5세라 부른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이민 와서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캐나다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게 더 익숙해 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안전판이 완전히 필요 없는 사람을 우리는 2세라 부른다. 한국에 대해 알면 좋지만 그것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부모 세대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안전판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들에겐 캐나다 자체가 제일의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두고 온 고향도 없다. 여기가 고향이다. 마음을 써야 할 사람들도 한국에 더 이상 없다. 한국은 그저 캐나다 이외의 다른 어떤 외국과 같다.
전기트랜스와 같은 안전판에 의지해서 살던 이민 1세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존도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의지나 계획 없이도 1.5세로 2세로 3세로 진화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자손들을 통해서다. 어찌 보면 이런 세대교체 현상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민자 가정은 그들의 캐나다 삶의 역사에 따라 그 안전판의 모습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민 생활 10년이 넘어가고 20년, 한 세대가 넘어가면 전기트랜스와 같은 안전판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큰 전기트랜스를 하나씩 장만하고 살아갔으면 한다. 그래서 누구든 이민 생활이 두렵고 힘겹고 지칠 때 손 내밀어 따뜻한 밥상이라도 함께 나누는 '사랑의 트랜스'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 좋겠다. 우리가 초보이민자일 때 전기트랜스를 통해 우리의 불안정한 삶에 위안을 얻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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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태완입니다. 이곳에 이민와서 산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이민자로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그때그때 메모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는 새로운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에서도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풀어놓고 싶은 얘기가 누구보다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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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이것,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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