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회족 거리에서 만난 회족의 모습
강윤경
시안은 중국 역사상 문화와 경제가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동서 교역의 발달로 경제적 부흥과 문명의 꽃이 만개했던 당시 장안(长安)의 인구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서며 국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물건'이라는 의미의 중국어 '东西(똥시)'의 유래도 당대 동서 교역의 한 축을 이루었던 당시 시안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안의 동쪽에는 국산품을 거래하는 커다란 시장이 발달해 있었고, 서쪽에는 서역에서 들여온 수입품을 판매하는 국제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시장을 아울러 '동쪽과 서쪽의 시장'이라는 의미에서 점차 '없는 것 없이 모든 물건이 다 있는 곳'으로 '东西'라고 불렀으며, 이 단어가 점차 '물건'을 뜻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장안의 발전 규모와 경제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안의 번영과 발전은 영원하지 못했다. 오랜 역사의 풍파와 함께 영광과 쇠락의 길을 반복하다 점차 빛을 바래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1987년 개혁개방과 함께 찾아 온 '신중국' 경제 발전 시기에 이 지역의 경제, 문화, 사회적인 지위가 성장의 궤도에 밀려 떨어진 것은 두고두고 뼈아픈 상처가 됐다.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도시들이 옛 시안의 영광을 재연하고 있는 동안, 시안을 비롯한 옛 중원 지역은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