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만들어져 몰래 사용되었던 통장 내역. 최근에 그는 이 사실을 알았다. 자립정착금은 원래 그의 몫이었다.
전윤환
시설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당시에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이후의 삶은 모든 걸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처절한 현실이었고 사투였다. 문제는 항상 돈이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주류 유통회사에 갔어요. 술을 마시는 건 싫어하지만 나르는 건 자신 있었어요. 술병을 채운 박스를 한꺼번에 몇 개씩을 등에 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노가다 중에 상노가다였어요. 일주일을 못 버틸 거라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말했죠. 50마지기 농사를 했다고. 사실이었어요. 시설에 있을 때 원장이 시킨 일 중 하나였거든요. 별장 짓는데 돌 옮기는 것도 지겹게 했고요, 또 양계장에서 닭 수백 마리를 닭장차에 집어넣는 일도 했어요. 그땐 종일 일하고 겨우 만 원 받았어요. 분명 더 주었겠지만, 나머지 돈은 알 수 없죠."
주류회사에서만 꼬박 일 년을 채워 일했다. 복학하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복지관에 취업했다. 하지만 3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척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이유였다.
"못 견뎠어요. 회의해야 하는데 못하겠는 거예요. 회의해본 적이 없었어요. 시설에 살 때는 명령과 복종밖에 없었으니까요. 명령에 익숙하고 의사 표현이라는 걸 해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회의 자리에 둥그렇게 앉으면 절로 오금이 저리고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어요. 대학 생활도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했으니 그게 나아질 상황은 아니었죠."
- 시설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받은 차별은 없었나요?
"이력서 때문에 직장에서는 숨길 수가 없었죠. 처음엔 다들 동정심으로 보기 시작해요. 하지만 저를 겪어보면 금방 파악이 되는 거예요. 논의하면서 자기 의견을 말하고 동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런 힘이 전혀 없었어요. 정서적으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고요. 게다가 여섯 시 퇴근 시간 되면 칼 같이 나가버리고요."
수습 딱지를 떼는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사실상 권고사직을 당했다. 백수 생활이 이어지다 겨우 잡은 직장이 사회복지 계통에서는 거친 일에 속하는 노숙인 쉼터 상담사였다. 일 년을 채워 일했다. 이때도 회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업무적으로는 저평가를 받았고 주로 청소나 정리 같은 허드렛일을 열심히 했다. 과거 시설에서 얻은 폭력의 트라우마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학 때는 잘 몰랐는데 사회에 나오니까 그때부터 진짜 고아더라고요. 주위에 조언해줄 사람은 없고 그저 맨땅에 헤딩인 거죠. 차라리 몸 쓰는 일은 잘하겠는데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상담하며 조언을 주는 일은 시설에서만 살아온 저에게는 한계로 느껴졌어요.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있는 평범한 삶의 이력이 제겐 빠져 있는 거죠. 그런 기초가 없으니 제가 버틸 수가 없는 거예요."
유일하게 말이 통하고 의지가 되었던 시설 친구들도 이십 대 10년 동안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모두가 도움이 필요했지만, 모두가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교회 후배들과 월세방에 함께 살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홀로 세상에 던져진 그가 기댈 유일한 피신처는 교회였다. 그 안에서 외로움을 이겨냈고, 그 안에서 세상의 몹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노숙인 쉼터를 그만두고 새롭게 복지관에 자리를 얻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관계의 어려움과 회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또다시 일 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는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회의를 느끼고 진로를 고민하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 강남에서 도시락 배달을 했다. 그걸로 등록금을 냈고 생활비를 댔다. 모자라는 돈은 빚을 내서 해결했다. 공부와 일로 빠듯한 3년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2월,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이십 대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 후배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한 뒤였다.
젊었을 때 입양을 꿈꾸었던 장모님과 시장에서 비닐봉지를 팔며 가난하지만 화목하게 집안을 이끌었던 장인어른은 고아로 자란 그를 입양한다는 마음으로 사위로 받아주었다.
재산은 천만 원 빚이 전부, 그래도 행복했다
가진 재산이라곤 천만 원에 달하는 빚이 전부였다. 방 한 칸 마련할 돈도 궁해 혼자 독립해 사는 처남 집에 얹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일 년 만에 빚을 다 청산했다. 다시 육 개월 만에 처남 집에서 나와 반지하 방을 얻었다. 방을 얻고 남은 돈이 없어 낡아 빠진 싱크대를 그대로 쓰기로 하고, 밖에서 주워온 철봉으로 옷장을 만들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얼룩진 천장이 바로 보이는데도 아내와 단둘이 있는 공간이 행복으로 가득 찼다. 절로 눈물이 흘렀다.
첫 아이가 태어난 건 결혼하고 3년 뒤였다. 전도사로 있을 때였다. 아내도 교회 행정직으로 취업해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전도사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손버릇 나쁜 청년들에게 내가 시설에서 당했던 폭력을 습관처럼 가했다. 순간 욱해지는 성질은 몸에 달라붙어 끈덕지게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목회자를 꿈꾸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강남에 따로 방을 얻어 살며 독하게 돈을 벌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육 개월, 다시 아내의 권유로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아내는 돈보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는 일상을 원했다. 3년을 무사고로 보내고 개인택시를 샀다. 택시는 그에게 맞는 직업이었다. 회의 때문에,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돈이 벌렸다.
개인택시 3년 만에 장애인 콜택시에 지원했다. 오만대 중에 오십대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합격할 수 있는 경력이 아니었지만, 합격할 수 있었던 데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의 효과가 컸다. 개인택시로 호출이 오면 비 휠체어 장애인을 태워다 주는 일이었다. 그사이 둘째가 태어났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다른 사람보다 늦게 집에 들어갔다. 400만 원대 중반으로 벌이도 좋았고, 새로운 사실도 깨달았다.
"장애인들은 건강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요. 몸은 불편하지만, 영(靈)은 참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고아원에서 자라 온 내 영(靈)이 장애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부모님들도 그 자녀들을 많이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해요. 부러웠고, 제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막 차오르는 거예요. 근데 저는 만날 방법이 없잖아요. 마음이 점점 아프기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서 호출을 받고 손님을 태워 경기도 양주에 있는 납골당에 내려주고 대기하고 있었다. 30여 분 시간이 남아 주위를 둘러보다 무연고자 납골묘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름 미상, 생년월일 미상. 유일하게 적혀 있는 사실은 발견된 날짜와 시간이었다. 어쩌면 고아일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렇다면 살아 있는 그의 이름은 정부 기관 어딘가의 호적 기록부 안에 남아 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생각은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갔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진짜 이름이 삭제될 가능성은 그를 사망이나 실종신고를 했을 경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인 그의 나이 만 19세가 되었을 때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서가 발부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역기피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을 것이고 일곱 살에 시설에 들어갔으니 역산하면 79년생 병역기피자의 명단 안에 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일곱 살에 헤어진 엄마와 누나가 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병무청, 행정안전부, 경찰서, 보건복지부 등으로 뛰어다녔다. 납골당에서 싹이 튼 희망의 씨앗 하나가 무럭무럭 자라 그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다른 것들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택시 일마저 못 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