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4일 오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신임외교관 임명장 수여 및 환영식에서 신임 외교관들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인사말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가장 큰 이유는 외교관에게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우리 사회에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합의가 없는 이유는 실제 외교관들이 하는 일과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정치인들이 외교관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간에 커다란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많은 외교관 지망생들이 그리고 외교에 관심있는 많은 일반인들이 외교관을 떠올리면 리셉션이나 파티에 가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국제회의에 가서 영어로 연설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일도 외교관이 하는 일 중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된다. 외교관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내 경험에 비춰 본다면 최소 95% 이상은 다 한국말로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외교부 본부의 경우에 서기관이나 과장급 정도 되면 매일 읽어야 되는 전문 등 문서량을 다 합쳐 몇백 페이지는 족히 된다. 그리고 그 문서라는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무슨 보고서 같은 것들이 아니다. 면담 기록도 있고, 행사 결과 보고도 있다.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기록 또는 그 후속 보고들도 있다. 인근 공관에서 보고한 내용에 대해 코멘트를 다는 형식으로 추가 보고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잡다하다. 내용도 이 내용 저 내용 매우 복잡하다. 아마 외교부의 문서 양식이나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문서들을 다 보여줘도 하루이틀 정도 읽어 가지고는 그 흐름을 따라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외교부나 대사관에 아침에 출근하면 누군가가 "오늘의 전문 내용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고 먹기 좋게 잘라서 내 입에 떠 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그 전문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정리해서 이해하기 쉽게 쟁점을 정리하고 공유하고 보고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외교관으로서 아니 공무원으로서 월급을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인 것이다.
아침에 나와서 문서를 빨리 소화하지 못하면 업무를 따라가기 어렵다. 당장 과장이나 국장 혹은 참사관이나 공사참사관이 회의를 하자고 하면 대개 시간도 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화의 전제는 참석자들이 모든 전문을 다 읽었고, 지금 현재 우리 부서 내에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만 부서내에 돌아다니는 문서를 안 읽어도 주변 동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러면 당연히 핀잔이 들어온다. "요즘 뭐하고 있어?" "(전문) 안 읽어?" 등등.
외교관이 문서를 생산하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냥 내가 전문 읽고 책상 위에서 끄적거리면 그게 대한민국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소관 캐비닛을 열거나 아니면 전자 문서 시스템에 들어가서 지금 당장 내가 작성하려고 하는 문서의 주제와 관련된 과거 관련 자료들을 찾아서 읽어 봐야 한다. 분량은 많다. 때로는 다 읽기 어려울 때도 많다. 어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외교관 역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다른 주제들에 대해 동시에 보고서를 써야 할 때도 있다. 과장이 시킨 일, 국장이 시킨 일을 따로 그러나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도 많다. 하지만 바쁘더라도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과거 문서들을 읽어야 한다. 과거 전례들을 잘 알고 있어야만 결재 과정에서 질문이 나왔을 때 대답을 제대로 하고 상사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담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봤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결재 과정도 만만치 않다. 내가 처음에 초안을 만들고, 과 차석이 보고, 과장이 보고, 심의관이 보고, 국장도 본다. 대사관이라면 참사관, 공사참사관, 공사한테 보여주고 오케이를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거 고치자, 이거 빼자, 그거는 중요한 것 같은데 왜 안 들어 갔어? 왜 이 문장은 석 줄이나 돼? 불필요하잖아. 두 줄이면 될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 등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오고, 한두 장 짜리 문서 하나가 최종 통과되는 데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정책을 만들거나 정부 입장을 정하는 것이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등본 발급하는 과정과 같을 수는 없다. 주민센터에서 하는 일을 낮잡아 보자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 조직의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고려해 봐야 될 사항은 점점 늘어난다. 타국의 입장이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외교의 경우에 정책을 만드는 과정은 더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공무원이라고 해서 신이 아닌데 미래를 전부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은 항상 불확실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과거 전례나 공무원의 경험, 관련 법령에 대한 해석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또 결재 과정에서도 경험있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조정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다양한 이해관계와 관점을 포괄할 수 있고,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렇게 읽고, 쓰고, 토론하고, 협의하고 하는 복잡한 일 처리 과정을 외교관이라고 해서 외국어로 할까? 전혀 아니다. 모두 우리의 말과 글, 즉 한국어로 한다.
얼핏 생각하면 외교관은 외국에서 오래 살고,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나니, 역시 외국에서 오래 살고 외국어에 익숙한 사람이면 좋은 외교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외교관들이 실제로 일하는 방식이나 그 내용에 비춰 본다면 외교관의 제일 조건이 해외생활 경험과 외국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외교부가 뭘 하는 곳인지 잘 모르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정치권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현재는 폐지된지 오래 됐지만, 과거 외무고등고시에 2부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때 논의가 시작돼 1997년도부터 몇 년간 실제로 시행됐던 외교관 채용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제도는 사실 당시 김영삼 정부에서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던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도입된 것이었다. 당시 문민정부는 개혁의 추진 동력을 집중하기 위한 표어로서 세계화를 들고 나오면서 국내 여러 부문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현재 법조인 산출의 제도적 경로로 자리잡은 로스쿨이라고 하는 것도 당시 세계화의 표어 하에 처음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외교 부문에서도 세계화에 맞춰 새롭게 내놓은 것 중 하나가 외무고시 2부 제도였다. 원래 취지는 해외에 있는 인재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한국 출신 재외동포 자녀들 중에 외국어에 능통하고 유능한 인재가 많으니, 그들을 흡수해 외교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해외에서 나고 자라 해외생활 경험이 많고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잘하니 그들이 좋은 외교관이 될 것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2부 제도라는 것을 신설했고, 외무고시 2차 시험을 두 과목만 그것도 외국어로 응시할 수 있게 해줬다. 그 당시에 세계 각국 재외공관을 통해서 2부 제도에 대한 홍보도 이뤄졌다. 재외동포 자녀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응시자나 합격자들 중에 재외동포 자녀는 거의 없었고, 현직 외교관 자녀들이나 국내에서 나고 자라다가 부모의 직장 사정으로 인해 해외에서 수학을 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가 지나도 이런 상황은 결국 바뀌지 않았다. 당초 기대와 달리 재외동포 자녀들은 이 경로를 통해 별로 들어온 사례가 많지 않다.
이명박 정부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당시에도 해외에 유능한 재외동포들이 많으니 이들을 대사관에 많이 채용해서 외교인력으로 적극 활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정부 내에서 제기됐다. 그래서 막대한 액수의 인건비 예산도 새로 배정이 됐다. 적절 수준의 대우를 해주어야만 유능한 해외동포나 그 자녀들이 응시를 할 거라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막상 인력을 뽑아 보고 운용을 해보니 결국 대부분이 국내에서 나고 자라서 오래 살다가 해외로 유학을 온 분들이었다. 해외에서 나고 자란 해외동포나 그 자녀는 응시율 자체가 높지가 않았다.
이 두 가지 제도의 운용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 외교 현장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인력 수요와 우리 정치권이나 혹은 정부 수뇌부에서 생각하는 외교관의 하는 일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해외동포 자녀들 중에 유능한 분들이 상당수 있는 것은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분들을 우리 정부로 불러 들여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외교 현장의 업무 수요나 방식을 고려해 볼 때, 해외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평생 살아온 분들이 외교부에 들어온다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인 것 같지만, 대한민국 외교부는 외국의 정부기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다. 당연히 모든 업무를 한국어로 한다. 그리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흡수해야 하는 한국어 문서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생산해야 하는 문서들 역시 복잡미묘한 한국어의 뉘앙스에 대한 고도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그렇게 글을 써 놓고 나면, 끊임없는 내부 토론 속에서 자기의 말과 글을 방어해야 한다. 모두 고도의 한국어 실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세계 어느 나라 외교부가 업무를 외국어로 하나? 전세계 어느 나라 외교부가 자국 외교관을 뽑는데 국어로 시험을 안 보고, 외국어로 시험을 보나?
물론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영어로 일하는 나라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은 영국 혹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식민지가 되기 전에도 여러 민족이나 지리적 단위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통일된 공용어가 없던 나라들이다. 우리나라처럼 영미의 식민지였던 적도 없고, 더욱이 수백년, 수천년에 걸쳐서 자신의 말과 글을 별도로 갖고 있던 나라가 외국어로 일을 하고 외국어로 사람을 뽑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외국에서 나고 자라 외국어에 능통하고 능력도 좋아서 그 나라의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가 취직을 할 때 즈음에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의 출신 국가인 한국에 애착을 느끼고 한국에 와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해 준다면 그런 고마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에 근거해서 우리 공무원의 채용과 인사제도를 운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평균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례들이 아니라 오히려 미담에 가까운 일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예를 들었던 외무고시 2부나 재외공관 전문 인력 채용 사례를 봐도 실제로 채용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내지 대학교의 전부 혹은 일부를 한국에서 졸업한 사람들이다.
평생 외국에서 살고,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편하고, 자기 친구들도 다 외국에 있고, 외국에서도 충분히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인 것이다.
사실 일반인의 외교관에 대한 이미지와 달리 외교관 이야말로 일반인보다 더 조국에 대한 애착이 필요하고,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직업이다. 해외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 외국인들이 우리 외교관들에게 미국이나 중국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대해 물어본다.
외교관이면 미국의 내부 사정이나 중국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우리 외교관의 최종 목표는 결국 우리의 국가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또 그것을 증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로 귀결된다. 타국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은 모두 결국 우리의 국가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외교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자국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만약 어떤 외교관이 해외에 나가서 오래 살고,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해서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잊어 버리게 된다면 그는 그 순간 이미 실패한 외교관이다. 조국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우리 국민의 이익과 국가이익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투철한 사상 무장이 돼 있지 않으면 외국에 가서 오랜 시간 동안 외국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조국을 위해 외교관으로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애국심이나 국가 이익이라는 상위의 개념을 떠나 실무 차원에서 봐도 외교관에게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여러 역량 중 외국어가 일순위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 국무성에서 외교관들을 교육시킬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은 사실 '글쓰기'다. 이것은 문학 수업 시간이나 중고교 시절 작문 수업 시간에 배우던 글쓰기와는 좀 다르다. 영어로 'political writing'(폴리티컬 라이팅)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하면 정세분석 내지 정세평가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외교관 본인이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외국, 즉 주재국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을 분석해서 보고서를 쓰는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이 사실 이 정세분석과 평가 업무이다. 정세라고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또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한 현실을 읽어 내고, 분석, 평가해서, 우리 국익의 관점에서 과연 현재 이 나라의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종합적 차원에서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좋은 정세분석과 평가를 하려면 객관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또 동시에 실제로 발로 뛰면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외국어는 사실 양질의 정세분석과 평가를 위한 수단인 것이다. 설사 외교관이라 해도 외국어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외국어를 잘하고 외국 사정을 잘 안다고 해서 그것 만으로 절대 좋은 정세분석과 평가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교의 세계에서 말하는 좋은 정세분석과 평가는 그냥 사실을 나열해 놓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먼저 우리의 국가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관점을 분명히 하고 그 입장에 서서 외국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강한 애정, 방대한 문서를 소화해 내는 독해력, 동료들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능력, 우리 국익의 관점에서 정세를 분석, 평가하고 정책을 건의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 이런 능력들이 외교관에게 필요한 핵심적인 능력들이자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국어를 잘 하거나 혹은 외국에 오래 살면 이런 능력이나 조건들이 저절로 따라올까?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만나서 좋은 외교관의 요건을 토론해 봤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외국 외교관도 외국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외교관의 외국어 실력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이면에는 분명 우리 정부가 해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높은 기대 수준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해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을 모른다면 결국 본말이 전도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외국어 못하는 외교관'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반복돼 온 것은 기실 대한민국 외교관들 스스로가 외교관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에 대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꾸 여론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30년, 40년 전, 외국에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여권 만들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던 시절에야 외국어 실력과 해외 생활 경험이 훌륭한 외교관의 요건 중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이나 능력 자체가 희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가? 요즘 세대들은 이미 취직하기 전에 해외여행도 해보고, 해외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해본 경우도 많다. 6개월, 1년씩 해외연수를 해본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현재 우리나라의 외교관 채용 방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국립외교원 외교관 후보자 선발 과정을 봐도 이미 외교부 들어오기 전에 수준 높은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렇게 해외 생활 경험과 높은 외국어 실력이 과거에 비해 확산돼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까지 외교관을 해외에서 오래 산 사람 내지 외국어 잘하는 사람 정도로 보는 이미지에 매몰되어 외국어와 외국 생활 경험이 마치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외교관을 통역관 정도로 보는 잘못된 이미지에 질질 끌려 다닐 것인가?
모든 외교관이 동시통역사 수준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애국심있고, 글 잘 쓰고, 교섭도 잘하고 한국말도 잘하고 거기다 외국어도 동시통역사 수준으로 잘하면 금상첨화겠지요"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국가행정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최고면 좋다고 하면서 모든 '금상첨화'들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고 하는 것은 실제 조직 운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업무와 교육이 따로 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