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가정폭력·살인사건의 피해자가 국가에 책임을 묻는 과정을 담은 다큐다. 1999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가정폭력 혐의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던 한 남성이 세 딸을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여성인권영화제
'아주 친밀한 폭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이 같은 사실은 가정폭력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서 짚은 것처럼 가정폭력은 무엇보다 사회가, 그리고 더 넓게는 이 세상이 바뀌어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그리고 이는 가정폭력에 반대하는 실천이 무엇보다 정치적인 운동인 이유이기도 하다). 결코 단시간에 달성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가정폭력 사건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왔다는 것은 이 폭력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가정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그리고 특히 가해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한 연구는 매우 많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공권력이 개입해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할 리 없다.
그리고 이는 거꾸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가정폭력 사건에 대해 책임 기관이 안일하게 대응하고, 이로 인해 누군가 고통을 겪었다면 정부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가정폭력을 '개인의 일탈적 범죄'로 파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이 낯설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가정폭력이 여성인권의 문제이며 이를 막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는 요지의 판결이 나오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동 재판소는 2009년 지속적인 가정폭력으로 생명을 위협을 느껴왔던 여성이 결국 남편에 의해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사건을 놓고 '국가가 생명권 보장을 위한 적극적 의무를 주의를 기울여 이행하지 않았으며 이는 유럽인권협약을 위반한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가 가정폭력과 살인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는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인권 보호를 위해 국가가 행해야 하는 의무
그렇다면 유럽인권재판소는 어떤 근거로 이러한 판결들을 내려왔을까. 재판소는 국가가 '인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행함에 있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정폭력 사건이 그 의무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먼저 '인권 보호를 위한 적극적 의무'란 국가가 단순히 침해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非)국가행위자, 말하자면 개인에 의한 인권 침해 행위를 방지해야 함을 뜻한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실질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국가는 단순히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 역시도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개입을 통해 막을 의무가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권 침해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법률과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상당한 주의의무'란 말 그대로 국가가 적극적인 인권 보호 의무를 이행할 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인권 침해 사건에 있어 국가가 보호와 예방, 조사 및 처벌과 보상을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 의무의 내용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앞서 언급한 판결을 살펴보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누군가의 범죄 행위로 특정인의 생명에 실질적이고 급박한 위험이 존재했을 때 관계 기관이 알았거나 혹은 알았어야 했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이는 '상당한 주의의무'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즉 해당 사건에서 피해자가 오랜 시간 가정폭력으로 위협을 받아 왔다면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결국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