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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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리얼리즘을 제대로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양을 읽어내는 이유가 눈에 보인다. 대지에 씨를 뿌리는 신성한 노동에 나선 주인공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모자에 가린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기에 우리의 시선은 그의 동작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팔을 휘두르는 동작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천리마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 구호 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있던 표어 "노동이 너를 해방시킨다"를 덧붙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반면, 빈센트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림을 마주하면, 우선 강렬한 태양에 압도되고, 다음에는 두 색의 현란한 대조에 시선이 간다. 도대체 왜 보라색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보라색 땅은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어쨌든, 인물은 나중에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밀레의 그림에서와는 달리,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팔에서는 역동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자세라면 그냥 들판을 걸어가는 중이라고 설명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자는 쓰고 있지만, 눈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조금 희극적인 느낌까지 든다. 동틀 녘 또는 석양이 깔리는 시간에까지 노동에 매진하는 밀레의 주인공이 노동자의 비애와 장엄함을 보여준다면,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찬란한 태양을 등지고 희망의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편지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고흐의 관찰력과 상상력에 감탄했지만, 곧 고흐가 믿고자 하는 '실제'에 대해 생각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말이다.
빈센트가 본 세상, 그리고 노랑
고흐의 노란색에 대한 집착은 싸구려 술 압생트의 독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는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고흐가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술에 취해 하늘이 빙빙 돈다. 그렇게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명작이 탄생한다. 그야말로 고흐는 자신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고흐의 편지는 '실제'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불안한 어조로 확인을 구하는 목소리로 끝난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니?
고흐는 묻는다. 자신에게 보이는 사물의 실제, 그것이 너도 보이지 않느냐고. 애절한 어조가 느껴진다. '이것이 나만의 실제는 아니겠지, 내 눈에 보이는 실제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라고 불안해하는 빈센트, 그가 동생에게 동의를 구하는 짧은 부가의문문이 애처롭기까지 하다.